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모든 것은 제가 책임지겠으니 일에만 집중해 주십시오.”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의 장남인 정기선 현대중공업 전무(기획 및 조선해양 영업 총괄부문장)는 영업 담당 임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것은, 스스로가 채워놓은 대주주의 마음이라는 벽을 허물고 소신껏 일하라는 뜻이다. 직원들이 업무상에서 벌인 과오도 자신이 안고 가겠다는 것인데, 사내에서도 이런 말을 들은 것은 오랜만이라는 이야기도 들리고 있다.
23일 창립 44주년을 맞는 현대중공업이 오너 경영체제로의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변화의 핵심인 정 전무는 지난해 11월 말 전무로 승진하며, 기존 기획재무 총괄부문장에 이어 조선과 해양영업본부를 지휘하는 영업총괄부문장까지 맡으며, 회사의 핵심 업무를 모두 관장하는 위치에 올랐다.
특히, 영업은 최고경영자(CEO)로 발돋움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리다. 상선과 육해상 플랜트 영업은 경쟁력 있는 가격제시와 최고의 생산성과 더불어 폭 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는 CEO의 역량도 중요하다. 정 전무가 영업을 담당한다는 것은 선주, 선사들과의 VIP 마케팅을 직접 추진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중공업을 비롯해 글로벌 조선업계는 올해 들어 극심한 수주 부진에 빠져 있다. 조선사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선주들의 발주 물량이 끊긴 탓이다. 올 상반기까지 이같은 상황이 지속될 경우 수주잔량, 즉 일감도 급감해 2~3년 후 조업이 중단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수주전선의 최전방에서 뛰고 있는 영업사원들의 사기가 떨어진 것은 당연하다.
전문 경영인체제가 지속되어 온 현대중공업은 그동안 영업 담당 임직원들이 자주 교체됐다. 단기 실적을 우선시 하고, 최고경영자(CEO)의 의향에 따른 것이다. 전문 경영인들은 대주주인 정몽준 이사장의 의중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조선경기가 호황일 때는 문제가 없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 후 지속되고 있는 불황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향후 사태를 예측할 수 없다 보니 이러다보니 어느 때는 출혈을 감내하더라도 일감을 가져오라고 지시하고, 또 어느 때에는 재무상황을 감안해 선별 수주를 하라는 등 영업 전략의 원칙이 무너졌다. 수주계약서에 서명하기까지 보통 수개월에서 수년 이 걸리는 조선·해양플랜트 영업활동이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졌으니 실적은 떨어지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리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현대중공업 영업 담당 직원들의 고민은 타사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에 정 전무는 영업 부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잔뜩 움츠러든 분위기를 하루라도 빨리 전환해 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구조조정을 지속하고 있는 현대중공업은 전 임직원이 하나로 단결할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한데, 한국 정서상 기업에서는 오너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이를 정 전무가 맡겠다는 것이다”면서 “정 전무라는 든든한 배경을 통해 현대중공업이 어떻게 변화하는 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최길선 회장과 권오갑 사장 등 현대중공업 CEO는 22일 발표한 창립 44주년 담화문을 통해 “수주 부진이 우려되고 있지만 무리한 과잉·적자 수주는 하지 않을 것다. 앞으로 사업본부 대표에게 보다 강력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겠다”면서 “현대중공업이 앞으로 회사 체질을 바꾸는 데 모든 것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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