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이나 우리나라를 막론하고 유명한 영화나 드라마 등을 통해 나타나는 유명한 대사들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고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지표로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성서의 좋은 구절과도 같은 명대사들...그중에 오늘 아침에 문득 2014년에 개봉되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용기를 준 『언브로큰』이라는 영화가 아닐까 한다.
영화 『언브로큰』은 루이 잠페리니라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다.
실화라고 믿어지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들이, 가슴 저미게 하는 이야기들이 이 영화에 담겨 있다.
선거철이 되니 서로 우리가 이렇게 어렵게 살게 된 것이 경제관련법을 통과 안 시켜준 야당 탓이라니, 경제를 이렇게 만든 여당을 심판해야 한다느니 공감할 수 없는 정치이슈로 서로 상대탓만 하는 모습에서 그 과정을 겪어온 평범한 국민의 입장에서 내 보모와 내 자식의 입장에서 나를 한번 돌아본다.
대학을 졸업하여도 취직 못하고 힘들어 죽겠다고 하는 자식들, 그를 바라보는 부모의 쓰라린 가슴들, 이를 해석하는 정치인들의 무식함(?)들...
과연 누구의 탓으로 돌릴 일인지 그냥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어느 통계에서 우리나라 학력 수준에 관한 기사를 눈여겨 본적이 있다. 56세 이후 65세 까지 평균 학력이 중학교 졸(어느 통계는 중2), 66세부터 해방둥이인 45년생(72세) 평균학력 초4년,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시절 부모의 학력을 기재 할 때면 부모 학력을 초등학교라고 적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리고 쓰는 불효(?)를 저질렀던 생각이 들고 기재 란에 무학이라는 ‘란’이 있었으니 격세지감이 든다.
상당히 의미 깊은 통계가 아닌가 한다. 사실 시골출신의 60초반인 내 나이 내 동창생들의 중학교 진학률은 30%가 되지 않았고, 거기서 고등학교 진학률이 30%를 넘지 못하였으니 믿을만한 통계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세대와 이전 세대들이 산업화를 통한 오늘의 경제대국을 만들기까지 『견딜 수 있다면 해낼 수 있다 (if you can, you san make it)』는 훌륭한 영어 대사가 아니라도 그것! 그 가치!로 살아왔음이다.
그래놓고는 내 자식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지 못했다. 그야말로 사다리차기를 해버린 것이다. 그들이 올라갈 사다리를 차버려 올라갈 생각도 엄두도 못 내게 만들어 버린 나와 내 친구들의 책임인 것이다.
문제는 일반적으로 “대학 졸업자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이라는 너무 형식적인 일반화가 오늘날 대학생 취업률을 바라보는 문제를 야기했다.
언론은 물론 전 국민의 시각인 것 같아 아쉽다. 우리 세대가 초등학교만 나오고 서울의 공장에 취직해서 배운 기술로 성공도 이루었고, 좀더 깨우친 사람은 주경야독을 했다.
그러나 못 배운 설움으로 “내 새끼는 무조건 대학 보내야한다는 강박관과 보상심리에서 너도 나도 배우고, 정부는 그런 배고픔을 채워준다며 사학들 부추겨 대학 설립”하게 하고 대다수 함량불량의 대학생 졸업생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닌지? 심지어 모시에서는 기계직을 모집하는데 지원자가 워낙 몰리니 토익 점수 950점을 기준으로 세웠다니 개가 웃을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다..
너도 나도 시험에 스펙쌓기에 내몰린 이 사회, 사회복지현장에서 일하다보니 그 어려운 청소년 상담사에 취직하려면 어려운 상담사자격과 함께 관련학과 석사학위 이상을 요구하지만 실제 그가 받는 급여는 대부분 임시직에서는 월 130만원을 넘지 못하는 계약직이 다수다.
이것이 말이 될 일인가? 우리들 주변의 공장에선 외국인만 득실거린다. 거긴 왜 일자리가 아닌가?. 너도 나도 나부터도 “너는 놀더라도 화이트칼라 아닌 곳에 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 벌이 아닐지 가슴속 깊이 반성해 볼일이다.
쉽게 한탕주의가 만연하게 하는 이사회!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우리 어릴 적 속담은 그 당시 우리들의 도덕과 윤리의식 속에 “그런 짓거리 하지 말아야한다”는 교훈성 속담이었으나, 이제는 “한탕주의라도 해야한다”는 잘못된 합리화의식이 자리잡아간다!
이제부터라도 『견딜 수 있다면 해낼 수 있다 (if you can, you san make it)』는 명대사의 말처럼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다가온 현실을 부정하고 투쟁하는 방법 보다는 견디고 해낼 수 있음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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