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보도지침' 창작극 '지침' 되기에 부족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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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4-0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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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지침' 한 장면[사진=벨라뮤즈 제공]


아주경제 정진영 기자 = "모두 카메라를 꺼내 주세요. 사진을 찍어서 오늘 이 기자회견을 세상에 알려 주세요."

배우들끼리 하는 대사가 아니다. 배우가 자리에 앉은 관객들에게 하는 이야기다. 그 순간 관객들은 연극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망하는 자'가 아닌 '적극적 관여자'가 된다. 이 부분에서 일어나서 나가지 않는다면 관객들은 김주혁 기자와 월간 독백 김정배 편집장의 폭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보도지침'은 제5공화국 시절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1986년 9월 월간 말은 '보도지침-권력과 언론의 음모'라는 특집호를 발간했다. 이 안에는 1985년 10월 19일부터 1986년 8월 8일까지 언론사에 시달된 584개 보도지침이 담겨 있었다. 이 일로 말을 발행한 김태홍 의장과 말지에 보도지침을 제공한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 등이 국가보안법 및 국가모독죄로 구속됐다.
 

'보도지침' 한 장면[사진=벨라뮤즈 제공]


연극에서 김주언 기자는 김주혁 기자로, 김태홍 의장은 월간 독백의 편집장 김정배로 재탄생됐다. 여기에 두 사람의 대학시절 친구인 황승헌 변호사와 최돈결 검사, 네 사람의 대학 연극반 선배인 장용철 판사,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남자와 여자가 추가로 등장한다. 남자와 여자는 극에서 멀티맨(1인 다역)으로 활약한다.

제5공화국 당시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은 많다. 언론사에 내려진 보도지침이나 언론통제 등을 다룬 작품 역시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고문의 참상은 여전히 살아서 그 시절을 증언하는 고문 피해자와 유가족들에 의해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보도지침'이 특별한 이유는 이미 널리 알려진 이런 이야기들을 무척 연극적인 방식으로 참신하게 구성했다는 데 있다.
 

흩날리는 보도지침들[사진=벨라뮤즈 제공]


관객을 극으로 끌어들인 첫 장면은 시작에 불과하다. 기자회견에서 두 언론인이 바닥으로 던진 보도지침들이 극이 끝날 때까지 바닥을 굴러다니고 고문의 참상과 그것이 갖는 의미를 의자에 서서 애국가를 부르는 배우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배우들은 때로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을 향하고 극 말미엔 보이지 않는 증인이 등장해 의미심장한 내레이션을 한다. 이 같은 연출 기법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오직 연극이기에 가능한 것들이다.

제작자들과 배우들이 작품에 얼마나 섬세하게 공을 들였는가는 대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작품에서 검사와 변호사는 끊임없이 언론사에 내려온 가이드라인이 '보도지침'인지 '보도협조사항'인지를 두고 싸운다. 같은 사안이라도 어떻게 프레이밍(뉴스 미디어가 어떤 사건이나 이슈를 보도할 때 특정한 틀을 이용하는 것. 독자들이 뉴스를 해석하는 데 영향을 미침)시키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일처럼 보이게 되는데 이를 잘 드러내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검사 편인 남자가 바람을 잡으며 "이 재판은 유죄냐 유죄가 아니냐를 판단하는 재판"이라고 말하는데, 이 대사 역시 마찬가지다. '유죄냐 무죄냐', '무죄냐 무죄가 아니냐'라고 표현했을 때보다 '유죄냐 유죄가 아니냐'로 표현했을 때 듣는 이들이 두 언론인에게 '죄가 있다'는 인식을 가질 확률이 높다. 이 역시 프레이밍의 일종이다.
 

'보도지침' 한 장면[사진=벨라뮤즈 제공]


중요한 이슈를 선택, 이를 지나치게 교훈적이거나 무겁게 풀어내지 않고 적절히 강약조절했다는 점에서 '보도지침'은 이미 창작 연극으로서 합격점을 받을만하다. 여기에 실험적인 시도들이 튀지 않고 이야기에 녹아드니 과장해서 표현하면 '창작극 지침'이 되기에 부족하지 않다.

무엇보다 '보도지침'이 관객들의 외면을 받기에 아쉬운 이유는 제5공화국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이 작품이 묘사하는 현실이 비단 과거의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지는 극에서 주인공이 여러 차례 하는 대사에서 짐작할 수 있다. "몰라서 물어?"

만 13세 이상. 105분. 오는 6월 19일까지 서울 수현재시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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