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대표책임사원’.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창업자의 명함에는 이런 직함이 찍혀있다. “회사는 직원들 것이다. 나는 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원 가운데 대표일 뿐이다”며 자신이 직접 만든 명함이다.
그의 직원 사랑은 유명하다.
삼구아이앤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청소·경비 용역업체다. 얼핏 보면 직원들의 상당수가 비정규직일 듯 싶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전 직원의 90%가 4대 보험에 가입된 정규직이다.
구 창업자는 청소하는 아줌마에게도 ‘여사님’이라고 호칭을 하며 깍듯이 대한다. 그는 “남편과 자녀들 뒷바라지를 다 해놓고 일터에 가서 남들 하기 싫은 궂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존경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뿐 만이 아니다. 회사 주식의 절반 이상을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이익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이는 구 창업자 자신이 사회적 하층민의 고통과 모멸감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했기에 가능했다.
1944년생인 그는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낮에는 아이스케키통과 구두통, 메밀묵통을 들고 다녔고 밤에는 야학을 다녔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걸레와 빗자루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동시에 서울 용문고등학교 야간학부에 입학했다. 새벽부터 낮까지 공장에 다니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한 뒤 동대문에서 미아리 집까지 걸어갔다. 한 달 버스비를 모으면 책 한 권을 살 수 있었다.
군대를 전역한 뒤 아내와 함께 건물 청소를 다녔고, 모은 돈으로 아주머니 2명을 채용해 1968년 삼구아이앤씨의 전신인 ‘극동’이라는 청소업체를 설립했다.
하지만 고난은 계속됐다. 청소용 왁스를 불법 수입했다는 혐의로 관세청으로부터 조사를 받은 뒤 왁스를 직접 만들기 위해 솔벤트를 희석하는 와중에 불이나 온몸의 절반 이상이 3도 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다. 아내는 치료비 빚을 갚기 위해 시장 한 켠에 좌판을 열었다.
좌절한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차를 몰아 잠수교로 뛰어 들었지만 천운으로 죽지 않았다. ‘죽음마저 뜻대로 안되는 구나’라고 생각한 구 창업자는 다시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마침내 1981년 열린 문화축제인 ‘국풍81’ 청소 입찰을 따냈다. 주관사였던 KBS 실무자가 그의 성실함을 높이 사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KBS에서 주관한 행사의 청소를 전부 맡겼다. 입소문을 타며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로부터 일감을 얻었다. 덕분에 모든 빚을 갚고 재기에 성공했다.
현재 삼구아이앤씨는 삼구이앤엘, 삼구FS, 나사산업안전 등 15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종업원 수는 1만9000여명에 달한다. 지난해 매출액은 6100억 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삶의 고통과 질곡의 터널이 길었다”는 구 창업자는 이를 버틸 수 있었던 비결로 ‘열정’을 꼽았다.
“열정은 멋진 꿈을 가진 사람을 도와주는 힘이고, 열정은 확신을 낳고 평범한 사람을 뛰어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열정만 있으면 극복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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