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욕심 부리지 말고 순리에 따르라. LG에 기대지 않고 사업할 수 있는, 자산이 건전한 회사를 만들자.”
LG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를 한 달여 앞둔 2003년 10월, 춘곡(春谷)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은 자식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당부했다.
춘곡은 슬하에 자홍(현 LS니꼬 동제련 회장), 자엽(LS전선 대표이사 회장), 자명(2014년 별세), 자철(예스코 회장) 등 4남과 근희, 혜정 등 2녀를 두고 있었다. 4명의 자식들은 LG그룹 계열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특히, 장남 구자홍 회장은 1991년부터 LG전자 대표이사를 맡아 회장까지 올랐는데, 그의 재임기간 LG전자는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자식들을 믿었지만, 그래도 미련은 남을 것이다. 능력이 모자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다들 기대 이상으로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있으니, 혹시라도 계열분리가 아들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춘곡은 마지막 다짐을 받기 위해 자식들에게 설득의 말을 건넸고, 자식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고 했다.
춘곡은 연암(蓮岩) 구인회 LG그룹 창업자의 넷째 동생이다. 1950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락희화학(현 LG화학) 전무로 입사했다. 얼마 후 정계에 입문했기에, 춘곡이 LG에 근무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LG가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6.25 전란을 전후해 미군 PX에서 쏟아지는 온갖 제품이 내수시장을 점령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연암은 “우리가 만든 제품으로 PX와 경쟁하고 싶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형의 마음을 읽은 춘곡은 “형님 우리는 여기가 집이고 공장 또한 여기 있습니다. 지금 물자는 귀한 시댑니다. 우리가 만들면 물건은 팔리게 돼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닐 때 우리만이라도 차분히 본분을 지킵시다”라며 응원했다. 연암은 초기 크림을 제조해 판매했는데, 대학재학 시절부터 크림 제조기술을 익힌 춘곡 덕분에 단기간에 제품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데서 벌어졌다. 락희화학의 크림을 구매한 도매상들이 크림통 뚜껑이 깨져 판매를 못하게 됐다며 항의를 한 것이다. 도매상들에게 새 제품을 교환해주는 것으로 마무리 했으나 ‘안 깨지는 크림통 뚜껑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한국 제조업의 현실에 화가 날 정도였다.
‘안 깨지는 크림통’은 연암은 물론 춘곡에게도 사활을 건 목표가 됐다. 고민하던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PX에서 본 ‘플라스틱’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플라스틱’을 만들 제조기반이 없었기에 연암과 춘곡은 플라스틱으로 크림통 뚜껑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어디서 어떤 기계를 사고, 어떻게 설치하며, 누가 움직여 제품을 만들어낼이지 등의 정보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춘곡은 일본에서 주문해 수입한 여섯 권의 서적을 수십번 읽고 기계와 원료 도입만 제대로 되면 희망을 걸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여곡절과 시행착오를 거친 후 공장을 가동했다. 첫 작품은 ‘오리엔탈(ORIENTAL)’이란 상표를 단 플라스틱 머리빗이었다. 이어 춘곡은 플라스틱 크림 병뚜껑도 개발, 자체 수급은 물론 다른 회사에 판매도 했다.
생전 연암은 동생 춘곡을 “제가 상황에 대한 깊은 인식과 앞날을 직관하는 예지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비결은 춘곡의 지적 해설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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