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최송희 기자 = 배우가 기억하는 작품 속 최고의 명장면은 무엇일까? 배우의 입장, 관객의 입장에서 고른 명장면을 씹고, 뜯고, 맛본다. ‘별별 명장면’은 배우가 기억하는 장면 속 특별한 에피소드와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다. 28번째 타자는 영화 ‘계춘할망’(감독 창·제작 ㈜지오엔터테인먼트· 공동제작 (주)퍼플캣츠필름 (주)빅스토리픽쳐스·제공 미시간벤처캐피탈㈜)의 여주인공 윤여정이다.
영화는 2년의 과거를 숨긴 채 집으로 돌아온 수상한 손녀 혜지(김고은 분)와 오매불망 손녀바보 계춘 할망(윤여정 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계춘은 잃어버린 손녀를 12년 만에 찾지만, 훌쩍 자라버린 손녀는 자신을 낯설어한다. 그는 손녀에게 내리사랑을 표현하며 서슴없이 그에게 다가가고 손녀 혜지 역시 마음을 연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대사가 마음에 들어요. ‘나는 물질로 먹고살지만 너는 그림으로 먹고살라.’ 그 늙은 할머니도 제 손녀의 특별함을 눈치채고 그가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길 바라잖아요. 그 장면이 와 닿고 대사가 좋더라고요.”
혜지에 대한 계춘의 사랑은 그야말로 내리사랑이다. 12년 만에 제 품에 돌아온 손녀가 흑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한한 신뢰를 드러내고 그를 북돋워 주기까지 한다. 마을 사람들은 혜지의 정체에 의심을 품지만 계춘은 오히려 자신의 손녀를 몰아세우는 마을 사람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하지만 혜지는 계춘의 신뢰를 저버리고 그의 쌈짓돈까지 훔친다.
“혜지의 정체는 계춘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늙으면 동물적 영험함이 생기거든. 아마 계춘은 ‘이 어린 것이 나를 등 처먹으러 왔을 땐 얼마나 끔찍한 사연이 있겠느냐’는 거죠. 단순히 핏줄, 피로 맺은 손주라는 의미가 아닌 진정한 가족의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 같아요.”
윤여정은 혜지에 대한 계춘의 감정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늙으면 다 알 수 있어”라는 말이 허투루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연륜 덕분이다. 그는 창 감독에게 “알아서 할 테니 잘 찍어달라”는 부탁을 남기곤, 자연스럽게 계춘의 마음이 녹아들도록 만들었다.
“내가 보기엔 정체를 알아차리는 타이밍이 중요하지 않았어. 난 그냥 계춘이 혜지의 정체를 은연중에 알았다고 보거든. 연기도 그렇잖아요? 나를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내가 느끼기엔 그래. 70살이 넘으면, 모든 중생이 안 됐어. 얼마든지 품을 수 있는 상처에요. 그 아이의 존재까지도.”
어딘지 초월한 감정은 너그러운 이해와 공감을 동반했다. 특히 혜지라는 인물에 대한 각별함은 윤여정, 스스로에 대한 공감이기도 했다.
“저 역시도 할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있죠. 사실 전 증조할머니와 친했고, 또 그분에 대한 죄책감이 있어요. 이따금 할머니께 정말 잘못했다고 당신의 사랑을 몰랐다고 말하곤 하죠. 증조할머니께서 저를 얼마나 끔찍이 예뻐하셨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그냥 먹던 것도 입에 넣어주고 씹어주고 하는 게 못마땅했던 거지. 그런데 50살이 넘으니까 알겠더라고. 그게 최고의 사랑이라는 걸.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예쁜 존재였겠어요. 그래서 영화를 찍으면서 힘들 때마다 할머니 생각을 했죠. ‘할머니께 바치는 영화다.’ 하면서.”
윤여정의 공감과 이해, 그리고 사랑이 담긴 영화 ‘계춘할망’은 이달 19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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