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최신형 기자 =여·야·정 협치(協治)가 3일 천하로 끝날 위기에 처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가 16일 오월의 아리랑 ‘임을 위한 행진곡’의 5·18 광주 민주화항쟁 기념식 지정곡 및 제창을 불허하면서 정국이 급속도로 얼어붙는 모양새다. 박 대통령이 지난 13일 여야 3당 원내 지도부와의 청와대 회동에서 협치를 강조한 지 사흘 만의 결정이다.
야 3당은 “잉크도 마르기 전에 약속을 파기한 것”이라며 정부·여당을 강력히 성토했다. 그러면서 박승춘 보훈처장 해임촉구 결의안 공동 발의에 나서기로 했다. 여당은 보훈처 결정에 유감을 표명하면서 재고를 요청했다. ‘국론 분열’을 이유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불허한 보훈처 결정으로 협치는 간데없고 또다시 극한 진영논리만이 남은 셈이다.
이에 따라 20대 국회 개원 전 정국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살얼음판으로 돌변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5·18 광주 민주화항쟁 기념식 36주기까지 이틀의 시간이 남은 만큼, 박 대통령이 ‘지정곡 불허·제창 허용’의 절충점을 찾아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회 온종일 전운…원구성 난항 예고
이날 오전 국회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보훈처가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합창 방식을 유지키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야당 내부는 격앙됐다.
특히 이 과정에서 청와대는 이 같은 결정을 20대 국회의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에는 사전에 알리지 않은 채 국민의당에만 사전 통보했다.
보훈처 발표 직전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관련 사실을 전하며 “지난 13일 청와대 회동 합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찢어버리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20대 국회 원 구성 난항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청와대 사전 통보에서 배제된 우상호 더민주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연락을) 못 받았다. 국민의당과 잘 해보라고 그래”라며 불쾌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등을 둘러싸고 여·야·정 갈등은 물론 야권 내부의 신경전까지 더해진 셈이다.
또한 박 원내대표는 이날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우 원내대표에게 ‘박승춘 해임촉구 결의안’ 공동 추진을 제안했다. 이에 정 원내대표는 “동참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여야 3당의 ‘박승춘 해임촉구 결의안’이 무산된 것이다. 다만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정의당과 함께 이를 공조 추진키로 했다.
◆보훈처 결정에 與 ‘혁신안 무력화’ 어쩌나
청와대와 여당은 곤혹스러워하는 눈치다. 청와대는 이날 공식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의 합창은 또 다른 분열을 막기 위한 고심의 결과”라며 보훈처 입장을 존중한다는 입장이다. 정 원내대표는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재고해 주기를 요청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 원내대표가 보훈처 결정의 윗선으로 박 대통령을 지목, 정부의 역사관 논란까지 번질 기세다. 박 대통령은 집권 1년차인 2013년도에만 광주를 찾았을 뿐 지난해와 지지난해에는 불참했다. 올해 제36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도 황교안 국무총리가 정부를 대표해 참석할 예정이다.
당 내부에선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전날(15일) 쇄신의 일환으로 꺼낸 ‘이원종(대통령 비서실장)·김용태(당 혁신위원회 위원장)’ 카드가 누더기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적지 않다.
4·13 총선 참패 이후 보수 혁신의 제2라운드 닻을 올렸지만, 동력 여부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의 전향적 검토 지시 등 강력한 결단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20대 국회의 순항도 예단키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이날 본지와 통화에서 “보훈처의 결정은 박 대통령이 정쟁의 중심에 서더라도 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며 “자기 스스로 큰 틀에서 변화하겠다고 선언한 상황에서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20대 국회 개원 전 정부와 여야 정치권이 정쟁을 일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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