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20일 한국을 방문하는 류치바오(劉奇葆) 중앙선전부장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서열 25위 안에 드는 정치국위원이며, 공청단파의 핵심멤버다. 정치국위원 중 또다른 공청단파 인사로는 왕양(汪洋) 부총리, 후춘화(胡春華) 광둥(廣東)성 서기, 리위안차오(李源潮) 국가부주석 등이 있다. 류치바오 선전부장을 포함한 이들 4인은 중국 현지에서 능력이 출중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모두 차기 상무위원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
류 부장은 1953년1월생으로 안후이(安徽)성 수쑹(宿松)에서 태어났다. 1974년 안후이사범대를 졸업한 후 그는 안후이성 선전부로 배치됐으며, 1977년에는 안후이성 위원회 판공청 비서실로 이동했다. 당시 안후이성 서기는 완리(萬里)였다.
1980년 그는 공청단 안후이성위원회 선전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공청단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982년 류치바오가 공청단 안후이성 선전부장일 때 지금의 왕양 부총리가 선전부 부부장이었다. 류치바오가 1983년 공청단 안후이성 서기에 올랐을때 왕양은 부서기로 일했다. 지금도 류치바오와 왕양은 상당히 긴밀한 관계다.
류치바오는 1993년까지 8년동안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일했다. 1993년 인민일보의 부총편집으로 전임됐다. 이듬해에 국무원 부비서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국무원 부비서장은 부총리와 국무위원들의 업무를 보좌하는 기능을 한다. 류치바오는 이곳에서 국무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지켜봤다.
이후 그는 2000년 광시장족자치구 부서기로 이동했다. 이 시기는 2002년 총서기 취임을 앞둔 후진타오 전 주석의 후광으로 공청단파가 대거 지방정부 지도자로 내려갈 시기였다. 류치바오는 2006년 광시자치구 서기에 올랐으며, 이후 2007년 쓰촨(四川)성 서기로 보임됐다.
그가 쓰촨성 서기에 오른지 반년인 2008년 5월12일에 규모 8.0의 쓰촨대지진이 발생한다. 지진발생 1시간만에 류치바오는 진앙지인 진앙지인 원촨(汶川)으로 이동했다. 그는 현장에서 구조작업을 지휘했으며, 쓰촨성 인민들에게 자원봉사를 와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열정적이면서도 침착하고 의연한 대처로 복구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인민들의 넓은 호평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류치바오는 2012년 중앙선전부장에 올랐다.
그가 중앙선전부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리춘청(李春城) 쓰촨성 부서기가 비리혐의로 낙마했다. 이는 저우융캉(周永康) 수사의 시작이었다. 저우융캉은 류치바오의 전임 쓰촨성 서기였다. 류치바오 집정시기 저우융캉의 옛부하들이 고스란히 쓰촨성에 남아있었다. 리춘청을 시작으로 쓰촨성 고위간부들이 추풍낙엽처럼 낙마했다. 류치바오 역시 한때 낙마설이 돌았지만, 그는 여전히 건재하다.
류치바오는 선전방면에서 류윈산(劉雲山) 상무위원에 이아 중국내 2인자다. 선전부장은 언론, 미디어, 출판물, 영화 등을 통제하며, 인터넷공간에서도 검열을 실행한다. 류 부장은 2014년 중앙문화체제개혁발전공작영도소조의 조장도 겸임하는 등 부단히 역량을 강화해왔다. 중국 현지에서는 그가 내년 개최될 19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퇴임이 예정된 류윈산을 대체해 상무위원에 등극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주요약력 ▲1953년1월 출생 ▲1972년 안후이성 선전부 이론연구실간부 ▲1977년 안후이성 위원회 판공청 ▲1980년 공청단 안후이성 선전부장 ▲1983년 공청단 안후이성 서기 ▲1985년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 1993년 인민일보 부편집장 ▲1994년 국무원 부비서장 ▲2000년 광시좡족자치구부서기 ▲2006년 광시좡족자치구 서기 ▲2007년 쓰촨성 서기 ▲2012년 중앙정치국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선전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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