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자오웨(趙月) 기자 =2016년 3월 <오색현요(五色炫曜)-난창(南昌) 한대(漢代) 해혼후국(海昏侯國) 고고성과전(考古成果展)>이 베이징 수도박물관에서 열렸다. 중학교육을 받은 중국인이라면 이번에 새롭게 발굴된 ‘해혼후묘(海昏侯墓)’가 역사교과서에서 본 유명한 한나라 시대 묘인 ‘창사(長沙) 마왕퇴(馬王堆)’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느낄 것이다. 양쥔(楊軍) 해혼후묘 고고학팀 팀장과 중국 한대(漢代) 전문 고고학자들은 모두 “출토된 유물 수가 마왕퇴보다 훨씬 많다”고 말했다. 마왕퇴 한묘(漢墓)는 서한 초기 장사국(長沙國) 승상 이창(利倉)과 그의 가족 묘로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 위치한다. 고분 구조는 웅장하고 복잡하며 부장품이 매우 풍부한 무덤이다. 고고학계는 마왕퇴 한묘가 한대 초기 중국의 매장 제도, 수공업, 과학기술 연구에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자료라고 입을 모았다. 이번에 발굴된 해혼후묘는 이런 마왕퇴 한묘를 초월하는 유물로 평가된다.
서한 시대의 거대한 보물창고
2011년 3월 23일 오후 4시쯤 양쥔 당시 장시(江西)성 고고연구소 연구원은 쉬장칭(徐長青) 장시성 문물고고연구소 소장의 전화를 받았다. 쉬장칭 소장은 난창시 신젠(新建)현의 한 무덤에서 도굴 흔적이 발견됐다며 그에게 가서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해혼후묘에 처음 들어간 양쥔과 그의 팀은 이 거대한 무덤의 발굴작업이 몇년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이 무덤은 도굴꾼의 손을 몇 번이나 탔다. 팀은 무덤에서 오대(五代) 시대(AD 907-960년)때의 도굴 흔적을 발견했다. 그러나 묘실 구조 때문에 도굴꾼들은 빈손으로 돌아갔고 덕분에 고분이 지금까지 남아 있게 됐다.
2015년 11월 수년 동안의 발굴 작업을 거친 해혼후묘가 마침내 신비의 베일을 벗었다. 30도 경사진 묘도(墓道)를 따라 천천히 무덤 문으로 들어가면 ‘회(回)’ 자형 넓은 곽실(椁室)이 나온다. 70㎡ 규모의 주곽실에는 4면을 둘러싼 회랑형 장합(藏閤)이 있고 복도로 격리되어 있었다.
무덤의 ‘회’ 자형 장합을 따라 한 바퀴 돌면서 고고학자들은 유물의 양에 깜짝 놀랐다. 남(南)장합은 복도와 동서 거마고(車馬庫)로 구성됐다. 이곳에서 외출할때 사용했던 수레와 말, 수행원 토용(土俑)이 대량 출토됐다. 시계 방향으로 돌아 들어가는 서(西)장합에서는 청동병기, 갑옷, 바둑판, 칠기, 다 셀 수 없을 만큼의 죽간과 백여 개가 넘는 목판이 발견됐다. 이렇게 문자가 새겨진 유물 덕분에 중국 서한 중기와 말기 사회의 원형을 복원할 수 있었다.
유물 양이 가장 풍부한 곳은 북(北)장합이었다. 여기에서 높이 2m의 ‘돈산(錢山)’이 발견됐다. 이 ‘돈산’은 무게가 10여 톤으로 동전 약 200만개가 있었다. 당시 계산법으로 환산하면 황금 50kg 가량의 가치다. 또 완전하게 보존된 악기 세트도 발견됐다. 동(東)장합에서는 주방 도구와 식기가 발견됐다. 여기서 발굴된 삼족 청동기는 오늘날의 ‘훠궈(火鍋, 신선로)’와 모양이 비슷했다.
회랑형 장합 외에 주곽실에서 출토된 유물도 고고학팀을 기쁘게 했다. 주곽실 서쪽에서 인물 형상이 그려진 칠기 병풍 세트가 출토됐다. 제자(題字) 부분에 어렴풋하게 ‘공자’와 ‘안회’ 등의 이름을 식별할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지금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공자의 초상화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는 또한 중국 서한 통치계급의, 유가만을 숭상한다는 ‘독존유술(獨尊儒術)’의 역사기록을 증명한 것이다. 병풍과 멀지 않은 서측실(西側室)에서는 놀랄만큼 많은 금기(金器) 무더기가 발굴됐다.
4년여의 발굴을 통해 고고학자들은 진귀한 유물 1만여 점을 출토했다. 청동기, 금은기, 철기 등이 3000여 점, 옥기가 500여 점, 목재 칠기가 3000여 점, 도자기가 500여 점, 죽간과 편독(片牍) 수천여 점이 출토돼 한나라 문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무덤 주인은 한무제의 손자인 유하
발굴 초기 양쥔 팀장과 고고학팀은 이 거대한 한묘의 주인이 혹시 해혼후(海昏侯)가 아닐까 생각했다. 해혼은 군현의 이름으로 기원전 201년에 설립됐고 범위는 지금의 난창시 신젠구 북부, 난창현 북부 일대다. 해혼후 작위는 대대손손 세습되어 4대, 168년 동안 이어졌다. 전문가들은 처음부터 무덤 주인이 1대 해혼후인 유하(劉賀)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한서(漢書)> <강서통지(江西通志)> 등 역사 문헌에 ‘해혼후 유하의 묘는 건창(建昌)현 서쪽에서 60리 떨어진 창읍(昌邑)성에 있다’고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곳이 지금의 난창시에서 북쪽으로 약 60km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2011년 4월 고고학팀은 고분 주위 5km2지역을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탐사해 성터, 묘지공원, 고분구역 등 완벽한 유적지를 발견했다. 묘지공원의 전체 면적은 약 4만m2로 크고 작은 고분 9개와 거마갱(車馬坑) 1개가 있다. 묘지공원 근처에서 3.6km2 규모의 해혼후 수도 유적지가 발견됐다. 이렇게 완벽한 배치와 제사 체계는 모두 서한시대 이곳의 최고 계급이었던 제후 해혼후를 가리켰다.
끊임없이 발굴되는 유물이 고고학자들에게 더 많은 증거를 주었다. 2012년 5월 고고학 팀은 고분에서 거마갱을 발견했다. 여기에서 목재 채색 마차 5대, 순장된 말 20필이 발견됐는데 뼈대는 이미 다 부패된 상태였다. 정교한 청동 거마기(車馬器, 마차나 말의 장식에 사용한 청동기) 3000여 점도 발견됐다.
이는 중국 창장(長江) 이남에서 발견된 진짜 거마(車馬)가 순장된 유일한 고분이었다. 한나라 때에는 거마갱에 대한 규정이 엄격했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면 무덤 주인이 1대 해혼후 유하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후 고고학자들은 무덤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했다. 내관(內棺)에 남아 있던 무덤 주인의 유해 허리 부분에서 ‘유하’라는 이름이 새겨진 옥도장이 발견된 것이다.
1대 해혼후 유하는 4명의 해혼후 가운데 우여곡절이 제일 많았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왕 중 한 명인 한무제의 손자인 유하는 33년을 살았다. 그는 한때 제위에 올랐지만 27일 만에 폐위되어 한나라에서 제위 기간이 가장 짧은 황제가 됐다. 폐위 후 산둥 창읍으로 내려갔고 다시 장시 황혼으로 사는 곳을 옮겼다.
발굴과 보존을 병행
해혼후묘는 발견됐을 때부터 발굴과 보호 작업이 동시에 진행됐다. 2011년부터 이 무덤을 발굴하고 연구한 지난 5년 동안 중국 최고의 전문가와 팀이 이곳으로 모였다. 주묘에서 출토된 동전 10톤을 정리하고 동전에 붙은 진흙을 제거하는 데만 사회과학원 박사후 연구원 4-5명을 포함한 인력들이 한 달 동안 작업했다.
현재 해혼후묘 주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방직품, 금속기, 목재칠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현장에서 정리할 수 없는 유물들은 전체를 포장해 실험실로 옮겨서 작업했고 후속 작업은 주로 실험실에서 완료했다. 고고학팀도 무덤 근처에 문물보호실을 만들어 유물별로 알맞게 보호했다.
양쥔 팀장과 고고학팀은 고고학의 사명은 발굴에만 있지 않고 유물에 담긴 부대 정보를 완벽하게 복원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발굴은 그저 고고학 과정의 첫 단계일 뿐이고 더 중요한 부분은 유물 보호와 과학적인 연구다. 칠기 복원을 담당한 한 전문가는 칠기가 너무 많아 “여기서 일하다 정년퇴직하겠다”고 농담조로 말했다. 양쥔 팀장은 “최소 2대에 걸쳐 노력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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