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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장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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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6-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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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승 양방웅의 노자와 장자 이야기
나비에서 꿩으로

시비를 따지면서 편견이 생겨나와

옛날 사람은 그들이 도달한 인식의 경계가 서로 달랐어요. 어떠한 경계인가?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천지에 사물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를 알았어요. 이는 인식 수준이 최고의 경계에 오른 사람으로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습니다.

다음 수준에 오른 사람은 사물이 생겨난 후 또는 아직 만물들 사이에 어떤 분별이 없던 때의 상태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 사람은 만물들 사이에 분별이 생겨났으나 아직 무엇이 옳고 그른지 시비(是非)의 구분이 안 되는 때의 상태를 아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시비를 따지면서부터 道에 관한 인식이 훼손되기 시작했어요. 道에 관한 인식이 훼손되면서 편애(偏愛)·편견(偏見)의 관념이 생겨났습니다. 과연 道에는 완전함과 훼손되는 성훼(成毁)의 개념이 본래 있는 것일까요? 그런 개념이 없는 것일까요? <물론 道에는 본래 성훼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있다고 인식할 뿐입니다.>

아무튼 성훼의 현상이 지금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마치 저명한 연주자 소문(昭文)이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를 ‘소씨고금(昭氏鼓琴)’이라 해요.

소문은 거문고를 타는데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를 지녔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불현 듯 깨달은 바가 있어 더 이상 거문고를 타지 않았지요.

거문고를 탈 때, 오음(五音) 중 어떤 한 음을 타서 소리를 내면, 다른 음의 소리는 나오지 않아 훼손된 것 같았으나, 거문고를 타지 않고 있으면 오음(五音)의 소리 모두가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있기 때문에 모든 음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내는 소리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거문고를 타지 않고 가만있으면서 오음 전체에서 울려나오는 화음을 감상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량이 매우 뛰어남을 비유할 때 ‘소씨고금’ 또는 ‘초군탁절(超群卓絶)’이라고 합니다.

혜자가 오동나무에 기대어 담론하는 솜씨는 완벽에 가까워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집니다.

그러나 소문이나 혜자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주길 바라고, 남을 깨우치려고도 했으나 이루지 못했지요.

소문은 아들이 아버지의 기예를 이어받았지만 이뤄진 것이 없었습니다.

혜자도 ‘견백지매(堅白之昧)’라는 모호한 담론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견백지매’란 작은 돌멩이를 손안에 넣고 만지면 단단함[堅]은 알지만 색깔을 모르고, 놓고서 보면 흰 색깔[白]임은 알지만 단단함을 모른다는 뜻 입니다.

이는 편견에서 생기는 애매모호함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이를 줄여서 ‘견백론(堅白論)’이라고도 합니다.

만일 이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룬 것이라고 한다면 나도 이룬 것이 있고, 이룬 것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이룬 것이 없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밖으로 현란한 빛을 나타나지 않으며 그저 평범한 쓰임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명지(明智)’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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