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에서 꿩으로
道를 가을철 짐승의 털끝이라 해도
지금 어떤 말을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말이 앞에서 말한 견백지매(堅白之昧)의 모호한 담론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같다고 해도 좋고 다르다고 해도 좋습니다. 모두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지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렇다고 해도 한번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우주탄생에는 시작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시작을 하지 아니한 그 전이 있고, 그리고 그 전의 전이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유(有)’가 있으면, 그 有가 있기 전에 无가 있다는 말입니다. 无가 있다면 无가 있기 전의 무언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무언가 있다면 또 그 이전의 무언가 있어야 하고 …
지금 내가 무언가 말하고 있지만, 정말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을철 털갈이를 끝낸 짐승의 가늘어진 털끝을 ‘추호지말(秋毫之末)’이라 해요.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미세하다는 뜻입니다.
道를 ‘추호지말’이라고 해도 천하 만물이 道보다 큰 것은 없으니 태산도 道보다 작은 것이요. 갓 나서 죽는다고 해도 道보다 오래 산 사람은 없을 것이니 팽조(彭祖)가 수 백 년을 살았다고 한들 요절한 것에 불과하지요. 천지가 무한(无限)의 세계에서 道와 함께 살고 있으니, 만물은 곧 道와 한 몸인 것이지요.
이미 만물과 道가 한 몸이라고 했는데, 무슨 논의를 더 해야 할까요? 그러나 “만물은 道와 한 몸”이라는 논의가 있었으니, 어찌 그것을 분별하여 분명하게 말할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물과 道’ 그리고 방금 말한 ‘한 몸’이라고 한 말을 합하여 따질 것이 둘이 되었고, 이 둘에다가 처음 한 말을 더하니 셋을 따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뻗어나가면 아무리 천재적 수학가라 할지라도 논의의 끝을 계산해낼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보통사람들이야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无로부터 有로 나아가도 금방 셋이 되는데, 하물며 有에서 有로 나아가면 한 없이 뻗어나가는 것이니, 그렇게 나가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끝내도록 하지요.
그래서 「道는 우주에서 가장 미세한 것이고 동시에 가장 거대한 것이다. 道는 없는 곳이 없다. 또한 없는 때도 없다. 道는 만물과 공생(共生)하고 병존(竝存)하는 한 몸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노자와 장자사상의 중심 화두(話頭)는 道와 德입니다.
道는 만물의 혼으로 만물을 생성하고, 德은 만물에 따라 道가 체현(体現)된 성품으로 만물을 축양(畜養)합니다. 그리고 물(水)은 만물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德의 상징물인 것이지요.
道를 별명으로 ‘大’라 하고, 道와 德을 조화시켜 만물의 생멸을 주제하는 자를 태일(太一)이라 불렀습니다. 道와 德을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태일이 누구인지 이해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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