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39년 12월 중순의 일이다. 총독부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대해 자진 폐간을 권고하면서 다음해인 1940년 2월 11일까지 폐간하도록 시한까지 정해주었다. 바로 창씨개명제(創氏改名制) 실시의 그날이다.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는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와 상의한 끝에 일본 정계(政界) 중앙부를 움직일 것을 시도하기로 했다. 겨울방학으로 집에 돌아와 있던 장남 상만(相万)에게 고하의 밀서(密書)를 가지고 도쿄(東京)로 떠나게 한 다음 뒤미처(그 뒤에 곧 잇따라) 1월 하순엔 송진우가 극비리에 도쿄로 건너갔다. 일본 정계의 막후 인물 도야마(頭山滿)와 척무대신(拓務大臣, 조선총독부 등의 사무를 총괄하는 일본 정부 관리)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1880~1950년. 총독, 군인, 정치가. 제9대 조선총독부 총독) 등을 만나 실정을 호소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그들의 노력은 주효하여 일본 정계에서는 이 문제로 일대 파문이 일어났고 사태는 일단 호전되어 폐간 방침은 철회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는 1937년 초 목당(牧堂) 이활(李活)보다 한발 앞서 귀국하여 보성전문(普成專門, 현 고려대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국이 어지러워 학교에도 총독부의 간섭은 극심해졌다. 교련(敎鍊,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기관에 재학중인 일반 학생들에게 실시된 군사 관련 교육훈련 과목)을 강화하라, 근로작업(勤勞作業)을 시켜라, 머리를 깎게 하라, 각반을 매라, 방공훈련을 하라 등등 교직원과 학생들을 들들 볶고 있었지만 설산은 오래간만에 가정적 안정을 얻어 다소 숨을 돌리는 몸이 되어 있었다.
학교에서의 설산은 관록으로 보나 설득력 있는 능변으로 보나 학생들의 영웅이었다. 이에 1941년 인촌은 보성전문의 체제를 정비하여 부교장(副校長)과 선도감제(生徒監制)를 신설하고 김영주(金泳柱)와 장덕수를 그 자리에 앉혔다. 말하자면 인촌 나름의 전시체제를 갖춘 셈이었다. 선도감은 근로 동원이네, 학생 지도네 하는 궂은일에 교장을 도울 수 있는 그런 자리였던 것이다. 설산으로서는 너무나 많은 노력과 수모를 혼자서 당해야 할 그런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한편 이럴 즈음 설산의 부인 박은혜가 중간에 서서 인촌의 둘째 딸과 목당의 외아들 병인(秉麟)의 결연을 추진하는 혼담(婚談)이 오가게 되었다. 니혼대학(日本大學)을 나온 후 목당을 대신하여 조부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을 도와 집안 살림을 맡아 보고 있었는데, 혼담은 진전을 보아 마침내 제기동 설산의 집에서 양가 어른들의 입회 아래 본인들을 선보이기에 이르렀고 곧 정혼하게 되었다.
목당은 전에 우연히 명동에 있는 양장점에서 인촌을 만난 일이 있는데 거기서 인촌이,
“인사 여쭈어라. 둘째 딸이오. 내가 런던에서 뵈웠다고 하던 이활 선생이시니라”하고 소개하여 장래 며느리감 될 색시를 일찍이 본 일이 있었고, 그 때 받은 인상도 나쁘지 않았던 터였으므로 혼인 이야기가 오고가자 두말없이 찬성한 목당이었던 것이다.
1941년 3월 6일 결혼식이 올려졌다. 목당이 인촌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임으로써 두 사람 사이는 우의(友誼, 친구 사이의 정분)의 교분(交分)만이 아닌 또 하나의 인연, 사돈(査頓) 사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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