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26]인촌의 고려대학교 설립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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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7-0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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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26)

  • 제2장 재계활동 - (21) 중앙학원에 1200 석지기 희사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정계가 어수선한 가운데 1945년이 가고 1946년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 해야말로 신생 한국에겐 더욱 커다란 격변기였으며 목당(牧堂) 이활(李活) 개인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한 해가 되었다.

4월에 재단법인 중앙학원(中央學院)에 농지 1200 석지기를 희사함으로써 목당은 육영사업에 참여했으며, 5월엔 한국무역협회(韓國貿易協會) 상무이사(常務理事)에 취임, 10월엔 대구 폭동 사건으로 영천 집을 불태워 잃었으며, 12월엔 과도정부 입법의원에 피선되는 등 실로 목당에게는 커다란 전기가 되는 한 해였던 것이다.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는 해방 전부터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현 고려대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킬 것을 생각해 왔고 해방이 되자 목당에게도, “정치는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와 동지들에게 맡기고 나는 학교나 맡아 키울 작정이오. 목당도 그렇게 알고 많이 도와주어요”하고 제의했던 것이다. 당시 보성전문학교의 주무이사는 인촌으로, 그는 이사회를 소집,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고려대학교를 설립할 계획 아래 학교 개편을 하는 등 서두르다가 고하의 피살로 교장직을 물러나기는 하였으나 인촌의 보전(普專)에 대한 애착과 집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1946년 5월 31일자로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를 해산하고 재단법인 중앙학원에 인계 흡수케 하여 이 재단이 보성을 경영하도록 하는 한편 재단도 보강하였는데 앞으로 농림대학을 설치할 계획 아래 그 실습 예정지로 종암동에 있는 농토 약 2만 평을 사들이고 약 5만 평의 애기능 구내와 학교 뒷산으로부터 안암동·종암동·미아리 고개에 이르는 약 50만 평의 귀속재산 및 국유임야를 불하받아 학교 용지로 확보하고는

김연수(金秊洙) 2000석
이활(李活) 1200석
소병곤(蘇秉昆) 700석
김상만(金相万) 500석

지기의 토지를 기부받아 재단을 강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목당은 오래 전부터 인촌과 사사로운 자리에서 만나면 으레 학교 운영에 대한 상의를 받았다.

“사돈, 보성은 전문학교 때의 이름이니 대학이 되면 갈아야겠는데 좋은 이름이 없겠소?”

“글쎄, 당장 떠오르지 않습니다.”

“보성, 조선, 고려 세 가지 명칭 중에서 하나를 택했으면 하오만·····.”

“영어 이름으로 조선이나 고려 다 같이 코리아로 불리니까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시면 되겠군요.”

“조선은 사대주의로 세력이 밖에 미쳐본 일이 없었으나 고려(高麗)는 한때 요동에까지 세력이 팽창하여 그 기상이 웅대 활달하고 자주불기의 정신이 뚜렷하므로 취할 만합니다.”

“농림대학을 설치할 계획으로 종암동에 땅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수당(秀堂)이 2000 석지기 땅을 내놓을 모양이고.”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은 목당의 이야기를 듣자 사돈댁의 거사에 새삼 탄복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고향 영천에서 유지들이 해방도 되었으므로 뜻있는 사업으로 영천에 중학교를 설립하고 경영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해오고 있는 무렵이어서 석와로서는 더욱 놀라운 바 있었다. 즉 목당가(牧堂家)로서도 민족 해방이란 거족적 경사를 맞아, 응분의 사회사업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해 오던 터였던 것이다. 영천 유지들의 중학교 설립 권고가 성화 같자 석와는 결단을 내야 했다. 인촌의 고려대학 설립을 돕느냐, 영천에 중학교를 설립하고 경영을 맡느냐,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석와는 결국 고려대학 설립을 돕기로 했다. 영천 중학교를 돕기로 한다면 오로지 혼자 힘으로 설립하여 끌고 나가야 할 형편인데, 학교란 여러 사람들이 같이 참여함으로써 교육목표의 영구성과 운영의 객관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석와는 무슨 일을 도모하든 장래성에 대한 철저한 검토 끝에 최종 결정을 내렸으며 일단 내린 결정은 어기는 일이 없었다. 그의 이재(理財)의 철학은 전망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일엔 손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석와는 가족회의를 열고 금호면(金湖面)의 땅 전부를 고려대학교에 기부할 것을 알렸다.

“영천중학교의 설립을 떠맡느니보다 거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중앙학원 재단을 돕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렇게 하여 목당 명의로 금호면 일대에 산재한 1200 석지기 논밭이 중앙학원 재단에 넘겨졌다. 그리고 중앙학원 재단이 보강되자 인촌은 1946년 8월 5일 군정청에 대학교 설립 인가신청서를 제출하여 광복 1주년 기념일인 8월 15일자로 고려대학교의 설립 허가를 받아냈다.

학교법인 중앙학원의 임원은 주무이사(이사장), 이사, 감사로 구성되었으나, 실무는 6·25 발발 이전에는 상무이사 1명 발발 후에는 사무국장 1명을 두었다. 이사의 임기가 5년이므로 5년 만에 한 번씩 이사와 감사를 개선하였는데 목당은 1950년 1월 이사로 취임, 1955년 2월 주무이사 김성수의 사망으로 주무이사가 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연임하였다.

재단법인 중앙학원은 1963년 6월 제정 공포된 사립학교법에 따라 1964년 4월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高麗中央學院)으로 명칭을 바꾸고 정관내용도 대폭 개정하였는데, 이때부터, 주무이사는 이사장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니까 1964년 4월 이후는 목당 이활은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으로 중앙중고등학교 및 고려대학교를 유지, 관리, 경영하는 일을 도맡아 왔던 것이다.

목당의 평생사업의 하나가 되었던 육영사업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졌고, 그에게 큰 보람도 안겨주었다. 현재는 그의 아들 병린(秉麟)이 뒤를 이어 이사로 있으니 그의 유지를 잇는 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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