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유학을 보내 외국에 사는 아이들이나 일찍 외국어(영어 등)를 익힌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SKY를 나오고 잘 나가는 직장에 다니며 외교관이나 해외지사장 등으로 나간 부모들과들 달리, 아니 비교해서 이 어린이들이 멍(?)해지거나 생각대로 안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기존 공교육에 적응을 못한 ‘해외유학생’ 출신들이 여기저기에 시골 대안 학교에 넘친다는 말도 있다. 공교육은 우리나라 교육이고 ‘해외유학’은 우리나라 밖이니 좀 모순적이다. 조기 유학에 실패한 아이들이 우리 공교육에 적응할 것을 기대한 것부터가 또 한 번의 잘못은 아닐까?
어린이들 가운데는 영어를 비롯한 현지 외국어와 우리말이라는 두 언어가 서로 다 잘 안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모국어도 잘 안 돼 자폐증이나 틱톡 등 심리상담마저 필요한 경우도 적지 않다. 아마도 자녀를 영재로 키우고 싶은 부모들의 조급한 욕심이 그 폐해의 원인은 아닐까?
두 언어를 배우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 예 때문에 두 언어를 가르치는 것을 그만둘 필요는 없다. 아니 시도를 안 할 이유가 없다. 우리 자녀가 영재일 수도 있고, 두 언어를 통해 얻는 '뇌에 자극을 주는' 교육이 나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제는 안됐지만 오늘은 되고 오늘 되었다고 내일도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는 통하지만 저기는 안되고 저기가 안된다고 거기도 안되는 것은 아니다.
이애는 안되었지만 저애는 되고 저애가 되었다고 우리애도 되는 것은 아니다.
외국이나 인텐시브 언어 교육 학습장 등에 살거나 다니는 아이에게서 집은 자기 언어로 의미를 맺는 유일한 공간이다.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 아이는 언어적 장애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낀다. 모든 상징체계와 의미, 인과, 인간관계 등의 환경이 다 바뀐다. 그걸 수용할 수 있는 힘이 아이에겐 무척 부족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6개월이면 아이들은 다 적응한다는 무식하고 무지몽매하고 매우 강요가 섞인 논리로 아이를 몰아부친다. 1년이 지나도 적응을 못하면, 누구나 '불안정한 아이' 또는 부모와 다른 ‘모자른 아이’로 낙인 찍힌다. ‘치료’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이미 내고 있어야 먹고살 수밖에 없을 듯한 일부 상담심리가에게 데려가면서 ‘병’은 커진다. 몇몇에게는 누구를 데려가든 거의 답은 나와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소극적인가 적극적인가라는 성격의 커다란 차이에 따라 언어적이고 문화적인 수용성이 달라진다. 몸이 자주 아프거나, 감수성이 예민하여 스트레스를 극복하거나, 그냥 쉽게 흘러버리는 성향이 강하지 못하면 매일 아니 매초마다 느끼는 충격을 수용하기 어렵다. 감당할 수 없이 들이닥치는 스트레스는 금방 한계치를 초월한다. 허용범위라는 그 경계를 넘어선 고통은 아이를 아프게 한다.
어른이 되서도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는 이도 적지 않다. 체력적으로 안 되고 심리적으로 불안해지면 그냥 직장을 그만둔다. 통보도 하지 않고 그만두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렇다고 이상한 게 아니라 소위 평범하다는 사람과 정말 조금 다를 뿐이다.
전근대사회에서는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 너무 복잡다변한 사회가 되어 적응이 더욱 어려워졌을 따름이다. 굳이 얘기하자면 점잖은 선비스타일이거나 현모양처 스타일로 삶의 수행자가 딱 맞는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비즈니스'나 ‘마케팅’ 더 나아가 무한도전식의 적과의 동침 등의 ‘전투’를 강요한다. 치킨게임과 같은 무한경쟁에서 얻은 스트레스와 고통은 개콘을 보며 치맥을 먹는다고 해서 치유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은 자본주의 아니 금권주의 폐해의 희생양이 되어간다.
어른들에게도 버거운데, 어린 아이에게 낯선 외국에서 2개의 언어학습이라는 매우 과분한 '짐'을 부과하는 ‘세상적으로 성공한 부모’라는 어른들의 조급한 강요는 감당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러한 ‘강요’가 '사랑'으로 포장되어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역겹기까지 하다.
외국에 살던 어른들도 그 나라 국제공항에서 수속을 마치고 우리 국적기에 몸을 싣으면 편안함을 느낀다. 그도 잠시, '한국인 승무원이 던지는 한국어 인사말, 즉 "안녕하세요"라는 말 한마디에 몸과 마음이 급변한다. 우리말이라는 코드가 입력되어 온몸이 부르르 떨리며 100볼트에서 220볼트로 변환을 하든가 컴퓨터처럼 새롭게 부팅이 진행되는 체험을 한다.
가까운 일본이나 먼 영국의 도로의 주행 방향뿐만 아니라 언어, 예의, 인간관계, 주소록, 친척, 도덕관, 가치 등이 한꺼번에 옷을 갈아입는다. 그렇게 몸은 여독과 함께 문화적 충격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가 된다. 그런 몸을 주관하는 마음은 더욱 힘들기만 하다. 뚱뚱하고 적극적인 어른도 그럴진데, 작은 어린아이의 마음은 아니 몸은 어떨까?
성향에 따라 변동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특히 시간적 흐름도 매우 중요하다. 인과관계의 흐름이나 주위 환경의 변화, 물론 부모의 애정의 등락폭도 포함해서 애들이 외국생활과 언어에 적응하는데 6개월이 아닌 6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아이들은 학년이나 학업의 프로세스에 제약받지 않고 아이를 편안하게 바라본다면 6년에 걸려서 적응을 하더라도, 정말 단기간에 대기만성할 수 있다. 그런데 채 하루도 안되어 아니 가기도 전에 ‘6개월내’라는 단서를 붙이는 부모는 ‘원수’일 따름이다. 부모가 원수가 되는 이 사회가 지옥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그릇이 다 다르다. 흙부터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릇이 만들어지는 소성의 시기도 다르다. 소성의 온도도 달라서 모두 다 소중하게 그 수용 성향과 시기 등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려면 세상의 편견이나 섭인관 등의 인지오류적 고정관념을 넘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런 안목으로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며 아니 바로 봐야 한다. 그런 노력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 바람직한 부모가 되는 방법이다.
근래 인성교육의 이야기가 화두가 된 적이 있다. 인성교육이란 ‘부모’가 되는 교육을 포함한다. 아무런 교육 없이 부모가 된 '몸 큰 바보'들의 행진이 국민을 개돼지로 만들어 간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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