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54]부산 피난, 현지서 무역통신 속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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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7-2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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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54)

  • 제3장 재계활동 - (48) 피난길의 무협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모친의 장례를 치르고 났을 즈음 시민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여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 초산(楚山)까지 진격하였다는 소식에 시민들이 환호성을 외치고, 10월 25일에는 워커 중장이 평양공략(平壤攻略) 축하연에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하였건만 바로 그날 오후에 중공군이 공세를 취하여 공격해 온 것이다.

11월 28일, 맥아더 원수는 중공군 100만이 북한에 집결중이며 유엔군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였다고 발표했다. 이에 목당(牧堂) 이활(李活)도 피난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동부전선(東部戰線)에서는 혜산진·청진·장진호 방면에서 후퇴를 개시하고 서부전선(西部戰線)에서도 12월 4일, 평양을 포기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1차 피난 당시 정부만 믿고 남아 있다가 화를 겪은 시민들은 전황이 불리하다는 소문이 들리기 바쁘게 12월 하순부터 다투어 피난길에 오르고 있었다.

목당은 부산에 무역협회 사무실을 마련하기 위해 20일경 나익진(羅翼鎭) 전무를 부산으로 내려보냈다. 한편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는 가족을 목당에게 부탁하고 한발 앞선 20일경에 부인과 함께 승용차편으로 부산으로 떴다. 당시 목당은 해운공사(海運公社) 고문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배편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친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은 이미 대구로 피신한 뒤였다.

이번 피난은 1차 피난 때와는 달리 소·대한(小·大寒)을 낀 엄동설한 속에서의 피난길이었다.

목당이 피난길에 오른 것은 삼우제(三虞祭)를 치른 다음날이었다. 아들 병린(秉麟)으로 하여금 인촌댁(仁村宅) 가족들을 인도하여 인천으로 오도록 지시하고 아내와 자부, 그리고 손자들을 이끌고 목당은 인천으로 향했다. 인촌댁만 하더라도 조만식(曺晩植) 부인을 비롯해 100여명의 인원이었으므로 목당 집안 식구까지 하여 적지 않은 인원이었다.

그런데 인천으로 내려가면 곧 승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출항수속이 뜻밖에도 까다로워 일행은 인천에서 1주간을 묵어서야 겨우 서울호에 오를 수 있었다. 뱃고동소리가 울리면서 뱃머리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서야 목당은 한숨을 돌릴 지경이었다.

참으로 처량한 일이었다. 그래도 자기네는 배편을 마련할 수 있어서 이렇게 안전한 피난을 하고 있지만 기차에 오르지 못한 수많은 난민들은 이부자리를 짊어지고 아이들을 끌며 걸어서 남하하고 있을 것이었다.

부산에 내린 인촌댁 가족들은 인촌이 임시 거처를 잡고 있는 중앙동의 삼양사(三養社) 지점 사무실로 가고 목당은 대한무역진흥(大韓貿易振興) 사장 오정수(吳楨洙)의 호의로 무역진흥 영도 포장공장 공장장집에 들게 되어, 우선은 우로(雨露)를 피할 수 있게 되었디고 하지만 목당은 부친 석와의 일이 걱정이었다. 부친을 모시깅 위해선 아무래도 독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마침 동대신동에 초가 한 채가 나온 것이 있어서 목당은 그것을 인수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전황(戰況)은 호전되어 유엔군은 평택·안성선에다 전선을 고정시키고 공산군의 남하를 허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듬해 2월에는 영등포와 인천을 다시 탈환하고 중부전선에서도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한 끝에 38선을 넘어 2월 11일에는 양양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이리하여 다시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유엔군은 마침내 3월 14일 서울에 돌입하여 이를 수복하였다.

나 전무는 미진상회(美進常會) 사무실 한모퉁이를 빌어 무역협회(貿易協會) 임시 사무실을 차리자 ‘무역통신(貿易通信)’을 속간해 내고 있었다. 그리고 협회가 자연 회원 상사들 간의 연락사무소처럼 되어 그런대로 협회 구실을 하기 시작했다. 더러는 다시 사업을 하기 위한 탐색을 위해 협회에 들르기도 하고 더러는 전세가 걱정이 되고 기약할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불안을 덜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 협회였던 것이다.

그런데 협회 사무진도 허전하고 회원들 가운데서도 낯익은 몇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 전무는 ‘무역통신’ 판매대전으로 그런대로 협회를 운영하면서 무역연감(貿易年鑑) 창간 멤버들로 하여금 무역연감 제2호(1951~1952년 합판) 편집을 서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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