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53년은 무역 개척을 위한 초기 무역시대(貿易時代)를 벗어나 수입무역으로 산업자본을 조성하는 수입무역시대(輸入貿易時代)로 전환하는 전환기였다.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전화(戰火)는 소강상태에 들어가고 유엔(UN)군 통합군 총사령부는 민간원조협정을 체결코자 사절을 특파하기 시작했는데, 최초의 대한민국과 통일사령부 간의 경제조정(經濟調整)에 관한 협정과, UN군 대여금 일부 결제(決濟)에 대한 각서(覺書)가 조인된 마이어 경제사절단이 내한한 것은 1952년 4월이었다. 마이어 협정(대한민국과 통일사령부간의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 1952년 5월 24일 한국의 재무부장관 백두진과 미국공사 C.E.마이어가 한국과 미국 정부를 대표해서 부산에서 체결한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에 의한 35000만 달러가 이 해 9월 2일에 영수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으로 하여 1953년 음력 설날이었던 2월 15일 긴급통화조치(緊急通貨措置)가 단행되었고 UN군 대여금 미청산금액(未淸算金額) 8580만 달러의 상환이 이루어졌다.
자금이 조성되자 당면 과제는 전후의 급속한 복구와 인플레 수습이었다. 이리하여 1953년 중에 약 600만 달러에 달하는 제1·제2 특별외화 대출이 중석불(重石弗)로 이루어져 수입무역시대를 열게 되었다.
그런데 1952년 11월 최초로 실시된 제1 및 제2 특별외화 대출제(特別外貨 貸出制) 실시와 아울러 수입상품별로 결정된 환산율, 즉 수입품별 차등비율(差等比率)을 적용하여 그 외화 대출액(貸出額)에 해당하는 국채담보금(國債擔保金)을 적립하게 하였다.
이 특별외화 대출은 이익률이 높은 인기상품에만 수입이 집중되는 것과 그에 따른 수입품 가격의 불필요한 변동을 막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공정환율 적용으로 인한 대출 대상자의 부당이익을 배제하는 동시에 수입 상품의 국내 가격을 평형화하며 단일환율(單一換率)을 찾고 이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데도 정책적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국내 물가는 계속 앙등하여 180 대 1이란 한화(韓貨) 대 미달러(美弗) 공정환율이 실제 환율과 차이가 생기게 됨에 따라 일부 업자들에게만 큰 이득을 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공정환율 180대 1의 외화를 한국은행으로부터 360대 1로 대출받아 보통 500대 1 이상으로 거래하는 돈장사가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밀가루나 비료와 설탕 등은 가장 인기있는 품목으로, 대다수의 무역업자들이 이를 취급했고 그에 따라 많은 중개업자들마저 호경기를 누렸다. 협회가 발행하는 ‘무역통신(貿易通信)’은 가장 인기있는 수입상품 신용장개설란(信用狀開設欄)과 수입통관란(輸入通關欄)을 두고 이를 게재함으로써 업자들이 다투어 구독하면서 열심히 검토하여 수입품목과 시세를 결정하는 중요 정보로 활용하였다.
물자의 공급이 여의치 못한 형편에서 외환수입품목 차등비율제(外換輸入品目 差等比率制)란 투기와 농간이 따르는 제도에 지나지 않았다. 업자들은 수출실적이 없더라도 정부가 불하하는 비수출외화(比輸出外貨)로 얼마든지 장사를 하였고, 그전처럼 협회를 통하여 머리를 맞대고 궁리할 필요도 없었다. 모두가 대외무역에 어둡고 자본이 영세하여 독자적인 행동이 어려웠을 때나 협동을 주장하며 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했지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 무역의 개척기(開拓期)는 이미 지났고 업자들의 독자적인 개인 무역(個人 貿易) 시대가 개막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것이 196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休戰協定) 조인에 의한 6·25 전쟁의 종식과 미국 원조자금(援助資金)의 도입이었다. 이런 실정으로 한국무역협회에도 전환기가 온 것이다. 회원상사들의 개성이 노출되기 시작하면서 무역 개척기를 이끌었던 협회 운영진에 대한 신뢰도도 전과 같지 않았다. 1952년 2월 22일로 실시 시작된 무역업자 등록제(貿易業者 登錄制)의 실시요령엔 등록업자의 자격 확인을 위한 추천권이 협회에 주어져 있었으므로 협회 회원상사의 증가 추세는 갑자기 급증하였고, 업계는 고철과 배터리설(屑, 가루)의 체화 및 흑연 수출과 중석 수출 상여율(賞與率) 등 허다한 문제들을 안고 있어서 협회는 늘상 해결해야 될 당면 문제들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런 면에서는 협회는 실질적으로 한국 무역의 총본산의 지위를 굳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초기 무역기의 협회를 이끌었던 운영진에 대한 신뢰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