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4·19 학생혁명에서 역천(逆天)의 인과(因果)를 보았다.
그러나 4·19 후 세상은 혼란의 회오리바람에 말려들었다. 어제까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李承晩)의 동상을 밧줄로 끌어내려 거리로 끌고 다녀도 제지할 그 누구 한 사람 없었고 국정(國政)은 무정부 상태가 되어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거리에는 불량배의 횡포가 날로 심하여 갔다.
4월 26일에 가서 국회는 이 대통령의 하야권고(下野勸告) 의안을 통과시킨 뒤 시국 수습의 협조를 부탁하는 호소문을 채택 발표하고 있었다.
국민(國民)에게 고함
민권(民權)은 승리(勝利)하였다. 이제 이 대통령(李 大統領)은 하야하고 재선거(再選擧)를 실시하게 되었다.
애국적인 학생·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그 위대한 힘을 유감없이 보여주어 신국면(新局面)을 타개하게 되어 국회도 또한
1. 3·15 정·부통령 선거는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실시한다.
2. 과도내각하(過度內閣下)에 완전내각책임제(完全內閣責任制) 개헌(改憲)을 단행한다.
3. 개헌 직후 민의원(民議院)은 해산하고 총선거(總選擧)를 즉시 실시한다.
이와 같이 결의(決議) 하였으니 국민 여러분은 냉정에 들어가 자치능력(自治能力)을 발휘하여 질서(秩序)를 존중하고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어 줄 것을 여러분에게 호소(呼訴)한다.
단기 4239년 4월 26일
국회 민의원
이와 같은 호소문을 발표한 국회는 정치적 공백기를 메우기 위해 우선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에 합의를 보고 허정(許政)을 내각수반(內閣首班)으로 하여 외무에 허정, 내무에 이호(李湖), 법무에 권승렬(權承烈)을 기용하여 사태 수습에 들어갔다.
국회를 불과 1주일 전까지만 해도 술수로 억압하고 폭력으로 제압하며 다수의 횡포를 능사로 삼았던 자유당은 권위도 위엄도 잃고 민주당의 제안에 무조건 순종했다. 세계 의정사상(議政史上)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기현상을 연출한 것이다.
국회는 정·부의장(正·副議長) 선거를 해야 했다. 이기붕(李起鵬)의 사망과 이재학(李在鶴)·임철호(任哲鎬) 두 부의장의 사표가 수리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민주당 소속의 곽상훈(郭尙勳) 의원이 의장으로 선출되고 김도연(金度演)과 무소속의 이재형(李載灐) 의원이 각각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총선거 준비를 서둘렀다.
민주당은 총선거 후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 헌법 아래 최초의 집권당이 될 것이 확실했으므로 과정(過政, 과도정부)에 대하여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7월 총선거, 8·15 신정권(新政權)의 정권 인수를 목표로 개헌안이 심의되던 5월 29일 전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
허정 내각 수반의 독단적인 배려로 비공개리에 은밀히 이 박사를 전송했다. 과도정부에는 목당의 막내아우 이호가 내무부장관으로 입각(入閣)했고 무역협회에서 같이 회장단(會長團)을 구성해 왔던 전택보(全澤珤)와 오정수(吳楨洙)가 각각 상공부장관과 체신부장관으로 입각했으며, 동반자였던 나익진(羅翼鎭)은 오정수의 보좌역으로 체신부차관에 오르고 있었다.
목당은 과도정부에 대해 친밀감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이 등용되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허정 내각 수반을 비롯한 행정가들에 의해 과도정부가 구성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했기 때문이다.
6월 19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내한하였는데 20일 아침, 미 대사 공관에서 열린 조찬회(粗餐會)에 유진오(兪鎭午) 총장이 장면(張勉)·최규남(崔奎南)·김재원(金載元)·강신명(姜信明)·장기영(張基榮) 및 서울공대 학생 한 명과 같이 초대되었다. 유 총장은 4·19 학생혁명에 선봉을 선 고대생(高大生)의 덕을 본 것이다.
고대도 이제 평온을 찾았고 교육계에도 한바탕 선풍이 불었지만 고대는 아무런 영향을 입지 않았다. 유 총장은 서울시 교육회장(敎育會長)을 연임하고 있었으며 9월엔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으로 선임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0월에는 유 총장을 총장(總長)에 재임명함으로써 그는 3기를 연임하게 되었다.
국회는 6월 22일, 민·참의원(民·參議員) 선거법안을 통과시켰고, 정부는 제5대 민의원과 초대 참의원 선거를 7월 29일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4·19를 겪은 후 목당 주변도 크게 변화하고 있었지만 목당 자신에게도 변화는 왔다. 한국무역협회 회장으로의 복귀와 민의원 선거의 입후보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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