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근소한 차이라고 하지만 7·29 선거에서 쓰디쓴 고배(苦杯)를 마셨다.
목당이 민주당 공천을 얻지 못하면서도 굳이 입후보했던 것은 유권자들의 충만한 혁명기운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격언이 있지 않은가. 목당은 그간 고려대학교 재단 주무이사(主務理事)로 있으면서 교수들과 학생 사회를 통해 팽배해 있는 민주혁신의 기운을 감지했다. 민주주의에 신념을 갖는 사람들이 7·29 선거의 승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것은 오산(誤算)이었던 것이다.
시류(時流)를 탄 민주당의 신·구파(新·舊派)의 대립은 선거전(選擧戰)을 통해 더욱 격화되어 이전투구(泥田鬪狗)의 경쟁을 연출하고 추잡한 골육전을 전개했다.
아무튼 선출된 국회의원은 민의원(民議院)에 있어서 233석 가운데 민주당이 175석으로 4분의 3을 차지했고 참의원(參議院)에서는 58석 가운데 민주당이 과반수인 31석을 차지했다. 그런데 민주당의 의석을 신·구파로 분류해 보면 어느 정파도 과반수 의석을 점하지 못하여 원내(院內) 안정세력을 이룰 수 없었다.
이래서 신·구파는 서로 필요한 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동조세력(同調勢力)을 규합하기에 열을 올렸다. 무소속은 개천에 든 소가 양편 언덕의 먹이를 뜯어먹듯이 양파(兩派)와 흥정을 하는 것이었다. 두 파로서는 우선 한자리라도 더 많은 의석을 확보하고자 무소속의 요구 조건을 거절할 수가 없게 되니 무소속의 권위는 다수당(多數黨)보다 더 강대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이런 사태가 모처럼 쟁취한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로 하여금 부패와 타락의 요인을 만들고 있었다. 목당이 민주당 공천을 얻고자 했을 때 그들은 앞서 지적한 대로 돈을 먼저 요구했다. 벌써 선거전부터가 신·구파늬 의석 쟁취를 위한 싸움이었고 앞서는 것이 돈인 그런 풍토를 연출했는데 선거 후 세력의 백중(伯仲, 세력이 비슷하여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으로 부패와 타락이 가속화된 것이다.
선거가 끝나고 국회가 소집되면 대통령과 국무총리, 그리고 민·참 양원(兩院)의 의장단 선출이란 막중한 과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즉 신·구파의 세력을 판가름하는 일전을 전개해야 했다.
목당은 선거를 치른 후 미련없이 무역협회 회장직으로 돌아왔다. 낙선(落選)을 위로하는 인사를 들을 때마다 그는 껄껄 웃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그런 웃음이었다.
신문에서 신·구파의 치졸한 세력싸움을 읽으며 목당의 마음은 착잡했다. 신·구파는 대통령과 총리 선거를 두고 분당(分黨)의 막바지로 접어들 것이었다.
새 헌법은 민·참 양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참의원의 향배 여하에 따라 대통령은 선출되게 마련이었다. 이때 총 58석 참의원의 각파별 세력분포는 민주당(民主黨) 31석(신·구파 합계), 무소속(無所屬) 20석, 자유당(自由黨) 4석, 기타(其他) 3석(한사당(韓社黨), 사대당(社大黨), 기타)으로서 최소한 3개 정파 이상이 야합하지 않고는 승산이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8월 12일에 열린 민·참 양원 합동회의는 대통령에 해위(海韋) 윤보선(尹潽善)을, 참의원 의장엔 백낙준(白樂濬), 그리고 부의장에는 소선규(蘇宣奎)를 당선시켰다.
12일 대통령으로 피선된 윤보선은 17일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을 지명했으나 과반수 미달로 8월 18일 운석(雲石) 장면(張勉)을 제2차로 지명하여 그가 당선되었다. 결국 장면이 제2공화국의 초대 국무총리로 정권을 맡아 정무(政務)를 집행하게 되었다.
당초에 구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당선시킬 작정이었으나 신파에 국무총리직을 빼앗기고 있었다.
국회의 인준을 획득한 장 총리는 8월 23일 허정(許政) 과도정부로부터 정무를 인수받고 있었는데, 원내(院內)에 안정세력을 갖지 못한 정권이고 보니 출범 초기부터 약체내각(弱體內閣)이란 세평을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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