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정진영 기자 = "저 드라마는 왜 남자들이 죄다 앞치마를 두르고 살림을 하는 거냐?"
최근 집에서 엄마와 TV를 보다 들은 말이다. 허둥지둥 "아 그게 왜 그러냐면 한 명은 대학 강사를 하다 잘려서 살림을 하게 됐고 한 명은 육아휴직 중이야. 왜 남자가 육아휴직을 했냐면 애가 둘인데 첫 애 때는 여자가 했었거든. 두 번이나 할 수 없어서 남자가 하는 거야"라며 설명했다. 변명 같은 설명을 듣고 엄마는 "아 그래서 그랬구나"라며 납득했다.
내 일도 아닌 TV 드라마를 가지고 왜 나서서 변명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남자가 집안일을 하는 걸 가지고 싫은 소릴 듣기 싫었다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그 저변엔 '당연히 집안일은 부부가 분담해야 되는 거 아닌가'라는 기자의 생각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비슷한 직군, 비슷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주로 어울려서 그렇겠지만 사실 기자 주변의 대부분 지인들은 맞벌이나 집안일 분담에 대해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성인이 된 뒤 만난 사람 누구에게서도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지', '남자가 무슨 앞치마를 두르느냐'는 말을 직접 들은 적은 없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드라마에서, 특히 일일극에서 집안일은 늘 여성의 몫이었다. 시어머니가 하던 일을 며느리가 그대로 물려받거나 아내는 남편에게 존대를 하는데 남편은 아내에게 하대를 하는 설정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이는 드라마의 주소비층인 1950년대~1960년대 여성들이 살아온 시대적 상황과 크게 어긋남이 없었기에 2010년대인 현재까지도 자연스럽게 이어져오게 됐다.
그러던 브라운관에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주역은 MBC의 일일드라마다. '회사에서 일하는 엄마, 육아에 전념하는 아빠'를 소재로 한 '워킹맘 육아대디'와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나선 '좋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두 작품은 모두 지금까지와 사뭇 다른 여성상을 제시하며 변화에 앞장서고 있다.
제목이 말해주듯 '워킹맘 육아대디'는 일하는 엄마와 집안일하는 아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실 다들 처음엔 '워킹대디 육아맘'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상황 때문에 워킹맘 육아대디가 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 육아휴직을 두 번 하는 걸 눈치 주는 회사에 다니고 있어 두 번째 아이 때는 남편이 아내 대신 육아휴직을 하는 집안이나, '밖에 나가서 일하라'는 아내와 '난 살림에 소질이 있으니 집안일을 하겠다'고 맞서는 남편이 갈등을 빚는 집안의 이야기들은 마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듯 현실적이다. 물론 이 같은 시대적 변화가 드라마의 주시청층인 중장년층 여성들에겐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68회까지 진행되는 동안 '워킹맘 육아대디'의 시청률이 줄곧 한 자릿수에 머물고 있다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
오전 시간대에 방송되는 '좋은 사람' 역시 10%대 초반의 시청률로 다소 뜨뜻미지근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보험설계사였던 여주인공이 남편의 죽음을 목격한 뒤 억울한 누명까지 쓰게 되면서 복수에 나선다는 이야기의 큰 줄기는 시청률이 설명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존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의 복수가 주로 바람피운 남편이나 매정한 시댁을 향한 것이었다면 '좋은 사람'에서 여주인공 윤정원(우희진 분)의 남편 이영훈(서우진 분)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아내바라기'였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편과 누명을 쓰고 망가진 자신의 인생을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해 나서는 정원의 이야기는 마치 위기에 처한 공주를 구하는 ‘백마 탄 왕자 스토리’의 여자 버전을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흔히 미디어를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한다. 시대가 변하면 거울에 비친 모습들도 달라져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그 동안 우리는 꽤 오랜 시간 현실의 왜곡된 환영을 브라운관을 통해 마주쳐 왔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맞벌이와 가사 분담이 당연한 젊은 세대에게 일일극들이 선택을 받지 못 했던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변화를 시작한 일일극의 선택이 좋은 결실을 맺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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