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64년 3월의 굴욕외교(屈辱外交) 규탄 데모 사태 이후 한동안 평온을 유지했던 학생들은 1965년 봄 한·일회담(韓·日會談)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자 다시 대일(對日) 저자세(低姿勢) 굴욕외교 반대 데모를 시작하여 4월부터는 고대(高大) 학생들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대학생들이 다시 거리로 뛰쳐나가고 단식농성을 벌이는 등 극한행동을 재개하였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마침 아일랜드에서 열리는 국제의원연맹(IPU)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여로(旅路)에서 학생들의 데모소식을 듣고 걱정스러웠다. 데모가 있다면 늘상 선봉에 서는 고대생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일이 더욱 걱정되었다. 유진오(兪鎭午) 총장이 얼마나 곤욕을 치를까 애를 태우는 것이었다.
귀국해서 들으니 10일 동안 휴교(休校)를 하고 다시 문을 열었다고 했다. 학생들은 언제 데모가 있었더냐 싶은 표정으로 등교하고 있음을 보고 목당은 한편으로 신기한 느낌마저 들었다.
5월 5일은 고대 창립 60주년을 맞는 날로서 기념사업이 추진중에 있었다. 학생들은 한·일협정 반대 보다는 모교의 60주년 기념행사가 더 중요한 것으로 판단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덕택에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의 창립 60주년 기념행사는 모두 평온 속에 거행될 수 있었다.
목당을 감동시킨 것은 학생들의 자진성금(自進誠金)으로 세워진 동편 언덕받이의 호상(虎像)이었다. 고대의 건학정신(建學情神)과 고대생의 기풍을 상징하는 호상을 그들 재학생들 손으로 건립한 것이 아닌가.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는 종합대학을 설계하면서 학교 명칭에 대해 궁리를 많이 했었다. 고려(高麗)를 딴 것은 요동에까지 세력을 떨쳤던 고구려 사람들의 그 웅대 활달한 기상과 자주(自主) 불기(不覊)의 정신을 취하여 민족정신의 누약성(檽弱性)을 불식하자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이 정신을 고대생들 뼛속에 깊이 새겨져서 이제 그들의 손으로 이 호상이 건립되는 구나 생각할 때 새삼 인촌의 교육이념의 승리를 재확인하는 것 같았다.
창립기념일을 전후하여 외국 저명인사들의 하객(賀客)이 많았는데 그중에도 그때 병고(病苦)와 빈궁(貧窮)에 쪼들리며 객지생활을 하고 있던 스코필드 박사(3·1운동 때 우리를 도와준 미국인 의사. 당시 서울에 살고 있었다)가 가난한 고대 학생을 위해 써달라고 500달러를 희사해 온 일은 감명적이었다.
6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추진해 온 것 가운데 아세아문제연구소(亞細亞問題硏究所)가 주관하는 국제 학술회의가 있었다. 국내 학자 30여 명 외국학자 30여명이 참가하게 될 이 학술회의는 ‘아시아에 있어서의 근대화(近代化) 문제’를 주제(主題)로 하고 있었다.
이 사업은 많은 자금을 써가면서 오래 전부터 기획해 왔던 사업인데, 참가하는 외국 학자들의 시간 형편으로 6월 28일부터야 워커힐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학생 데모는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6월 18일에는 고대에서도 데모가 다시 일어나 사태가 나날이 악화되더니 28일에는 일부 대학생들이 시내에서 폭동을 벌이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문교부가 종용하여 고대도 30일에는 하계방학(夏季放學)을 당겨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란중에도 국제학술회의(國際學術會議)만은 성황리에 끝마칠 수 있었다. 이를 치르는 데 유 총장의 수고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 총장은 35년 동안 보전(普專)과 고대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온 위대한 교육자(敎育者)였다. 일제하에서부터 보전을 지켜와 해방이 되어 고려대학으로 발전적으로 변신된 뒤에도 계속 학교를 지켜온 그였다. 인촌의 뜻을 받들어 고대의 건학정신과 고대생의 기풍을 뿌리내리게 한 것 또한 바로 그였다.
4·19 이후 계속된 학생 데모 파동 속에서 학생들의 순수성을 끝까지 믿으면서 학교의 명예를 지켜온 현민(玄民) 유진오(1906~1987년)는 고대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런데 유 총장이 10월 1일로 끝나는 임기를 마지막으로 물러서겠다고 말해왔다. 그해로 현민은 60의 환갑을 맞고 있었는데, 환갑을 기해 후진에게 길을 열어 주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는 그러고 나서 훌쩍 세게 교육자대회와 아시아 재단이 주선한 외국 여행길에 오르고 말았다. 물론 현민은 여행에 오르기 전에 정식으로 사의(辭意)를 표명했고, 후임 총장으로 부총장으로 있는 이종우(李鍾雨)를 추천하기까지 했다. 김상협(金相浹)을 설득했으나 끝내 듣지않아 이종우를 추천한다는 것이었다.
목당은 창동으로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를, 그리고 계동의 인촌 미망인을 찾아가 경위를 설명하고 후임 총장에 이종우를 선임하는 일에 단락을 지어 문교부에 승인 요청을 냈다.
8월 22일에 또 학생들의 데모가 재연되었고 4일째로 접어든 비준(批准) 반대 학생 데모에 무장 군인이 출동, 25일에는 고대에 진입, 주둔했다. 총장이 궐석 중에 벌어진 사태여서 유 총장이 이때처럼 아쉬을 때가 없었다.
목당은 유 총장의 즉시 귀국을 요청하는 전문을 여행지 영사관으로 띄웠다. 그러나 유 총장은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라’는 내용의 답전(答電)만 보내오고 귀국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부재(不在) 중의 사무 인계를 이종우 부총장에게 하고 떠났으므로 도중에 스케줄을 중단하고 돌아올 수 없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정부는 8월 28일에 주동 학생들의 검거에 나서서 다수의 고대생들도 검거되어 갔다. 30일엔 홍종철(洪鍾哲) 공보부장관 이름으로 학생 처벌 등의 지시를 어긴 데 대한 행정조치를 고려하겠다는 통보와 함께 데모 학생 명단이 전달되어 왔다. 이어 9월 4일에는 고대와 연대(延大)에 무기(無期) 휴교령(休校令)이 내려지고 학사감사반(學事鑑査班)이 들이닥쳤다.
고대가 최대의 수난을 겪고 있어서 목당은 여간 안타까운 심경이 아니었다. 유 총장은 학생 데모에 대처할 줄 알았다. 그것은 학생들이 그의 양식(良識)을 믿는 데서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학생들의 영웅이기도 했다. 그가 있었다고 하여 사태가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백전노장(百戰老將)이 버티고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차이가 크다 하겠다.
16일 만인 9월 20일, 휴교령이 해제되고 학생들이 등교하기 시작하자 목당은 유 총장의 귀국을 기다릴 것 없이 신임 총장의 취임식을 갖기로 하고 준비를 서두르게 했다. 이리하여 10월 1일, 이종우 총장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는데, 전임 총장의 여행중에 신임 총장의 취임식을 갖는다는 것은 인사가 아니었으나 부득이한 일인데는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곡절을 거쳐 유 총장은 고대 60주년 행사를 치르는 것을 끝으로 35년 동안의 보전·고대 생활을 명예롭게 장식하고 물러났다. 그가 퇴임하는 이임식(離任式)은 10월 7일에 가서 있었는데, 그는 이임사(離任辭)에서 “본인은 임기만료의 마지막 날까지 총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싶었는데 그 맨 마지막 순간 (중략) 전무후무의 불사사가 돌발하여 학생은 부상을 입고 몇몇 교수는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본인은 이 최대의 불행을 동료 및 학생 제군과 함께 나누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공자(孔子)가 말씀하신 대로 비여위산(譬如爲山)에 미성일공(未成一篢)한 감입니다. (하략)”라고 했다.
현민은 총장을 그만 둔 뒤에도 만 1년 동안 대학원(大學院) 강의를 맡아 주었고, 1966년 10월 민중당(民衆黨) 총재(總裁)가 되어 정계에 투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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