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에는 목재로 안쪽을 댄 넓은 구덩이를 마련해 돌로 채운 다음 흙으로 덮는 고분 방식인 한국 특유의 무덤 체계가 나타난다.
고려시대의 왕릉들은 산기슭에 3~4층 단을 쌓고 맨 윗단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봉분을 두고, 아래로 석등, 문⋅무인석, 제향각 등을 배치했다.
경계 석주, 석등, T자형 사당, 비석과 비각 같은 새로운 특징을 갖추고 호랑이, 사자, 양을 조각한 석물들이 봉분을 둘러싸기도 한다.
개성지역에는 고려 태조의 무덤 등 20여기의 왕릉이 현존하고 있다.
고려시대 재위 왕은 모두 34명(대수 36대)인데, 무덤 임자가 밝혀진 것은 12기이고, 현재 모습이 알려진 곳은 태조 왕건의 현릉과 31대 임금인 공민왕,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쌍릉인 현⋅정릉 정도이다.
강화도에는 희종(21대)의 무덤인 석릉(碩陵)과 고종(23대)의 무덤인 홍릉(洪陵), 그리고 강종(22대)의 부인 원덕태후의 무덤인 곤릉(坤陵)과 원종(24대)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인 가릉(嘉陵)등 총 4기의 고려 왕릉이 남아 있다.
이들 왕릉은 모두 고려가 강화로 천도했던 시기(1232~1270년)에 조성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천도시기에 강화도에 머물렀던 사실 외에도 인천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주이씨 이자연의 세 딸(인예태후, 인경현비, 인절현비)이 문종(1046~1083)의 비가 되면서 이후 7대 80년간에 걸쳐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특히, 첫째 딸 인예태후의 아들인 숙종의 후손들이다.
여기에 숙종의 아들 예종과 그 아들인 인종 역시 인주이씨 이자겸의 딸들과 중첩된 혼인을 했고, 그로부터 희종(21)-강종(22)-고종(23)-원종(24)으로 계보가 연결되고 있다.
현재 고려 왕릉 중, 강화도 외에 남한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공양왕릉이 있지만, 당시 시신을 어디에 묻었는가 알 수 없어 삼척시와 고양시 두 곳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어느 쪽이 왕릉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고려시대 강화도는 대중국무역의 교통로로써 해상교류의 거점의 역할을 수행했고, 고려 후기 제2의 수도로써 왕도(王都)이자 또, 왕실의 보장처였다.
여기에 홍릉을 비롯한 4기의 고려 왕실릉이나 팔만대장경 조판 등의 문화유산들은 남한지역에서 흔하게 접할 수 없는 귀중한 고려시대 자료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