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주진 기자 = ‘해체냐 쇄신이냐’. '망국적 정경유착의 검은 공룡‘으로 지목되고 있는 한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이 설립 55년 만에 중대 기로에 서 있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 불법 지원 의혹에 이어 특혜 의혹이 제기된 미르․K스포츠 재단의 거액 모금에 대기업 회원사들의 이익단체인 전경련이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비판 여론이 빗발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야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정권의 수금 창구로 전락한 전경련이 이제는 조직 개편 수준을 넘어 스스로 해체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점차 높이고 있다. 전경련 회원사들이 포진한 재계 내부에서도 전경련의 '발전적 해체'나 '건설적 역할 쇄신론'이 나오고 있다.
박근혜정부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던 국가미래연구원과 진보 성향의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4일 “민주주의와 시장질서를 해치는 정경유착에 휘말려 국민경제 발전에 역행한 전경련은 존립 근거를 잃은 만큼 회원사들이 결단을 내려 해산할 것을 권고한다”는 공동성명을 냈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원장은 “산업화 초기 전경련이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평가하면서도 “한국 경제도 발전했고, 세계 경제도 달라졌다. 변화한 환경에 맞추어 전경련은 활동 목적과 방식을 근본적으로 혁신했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도 “전경련이 자정능력을 상실했다. 회원사들보다는 상근 조직인 사무국의 자체 논리에 따라 운영되는 등 내부 통제장치가 완전히 붕괴됐다”면서 “전경련이 정치적 목적과 연계될수록 회원사들과는 더욱 더 멀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회원사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회원사들이 통제하지도 못하는, 회원사들에게 오직 부담과 불만의 대상이 된 전경련이 존속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해체를 주장했다.
이필상 서울대 겸임교수는 “전경련이 좋은 의미에서 보면 대기업 중심의 협회 성격을 띠면서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잘만 활용을 하면 좋은 역할을 하면 사회적 자산도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이 교수는 이 같은 리모델링 방안에 대해 “전경련이 환골탈태 수준으로 바뀐다는 전제 하에서”라는 조건을 달았다.
여야 정치권과 대선 후보들도 잇따라 전경련을 비판하면서 해체 공론화에 나섰지만 대안은 뚜렷하지 않다. 민간단체인 전경련의 해체나 변화를 강제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가장 문제다.
이 때문에 여권과 일부 보수진영에서는 단순 해체보다는 ‘큰 틀에서의 리모델링’, 즉 ‘셀프 개혁’에 방점을 두고 있다. 반면, 야권은 우선 자발적으로 해체한 뒤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쪽이다.
일각에선 정부 공식행사에 전경련을 배제하면 해체와 유사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방법론도 제시했다. 전경련은 지금도 대통령의 해외순방 때마다 경제사절단의 참가 기업 모집을 주관하고, 정부와 민간의 각종 위원회에 경제계 대표로 참석하는 등 대한상의와 함께 경제단체의 두 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정권을 잡을 때마다 전경련을 활용해왔다는 점에서, 과연 정치권이 전경련을 해체시킬 진짜 의지가 있는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전경련, 자발적 해체 가능성 ‘제로’...향후 대안은?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12일 국회 기재위 국감에 증인으로 출석해 전경련 해체 촉구에 대해 "소명을 충실히 해서 국민의 신뢰를 받는 단체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 말을 비춰보면 전경련이 스스로 해체할 가능성은 제로인 셈이다.
전경련의 향후 행보에 관해서는 해체안 외에 싱크탱크 내지 공익재단 전환론과 대한상의 흡수통합론이 함께 나온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전경련 대신 법정 단체이자 중소상공인을 포함한 가장 많은 경제단체가 가입한 대한상의가 기업집단의 대표로 나서야 하고, 정부나 언론에서도 대한상의를 기업의 대표로 호명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원치 않는 회원사는 전경련을 탈퇴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정단체인 대한상의는 정경유착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 전경련과의 통합에 부정적이다.
싱크탱크 내지 공익재단 전환에 대해서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실현 가능성, 실효성 면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앞서 전경련은 미르·K스포츠 재단이 논란이 되자 두 재단을 대체할 신규 통합재단을 설립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재벌그룹의 공익재단들이 공익 사업비를 대거 줄이고 있는 추세 속에서 새로운 재단 설립과 운영은 얼토당토않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싱크탱크 전환과 관련, 전경련이 정책연구 인력을 확충해 시장경제 발전과 신산업 육성에 부합하는 정책과 국가 미래비전을 제시하는 싱크탱크로 환골탈태해서 시대적 과제인 격차해소를 위해 중소기업과의 상생, 경제력 집중 완화에 일정 부분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보수적인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AEI)나 헤리티지 재단이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단지 싱크탱크로 바뀔 뿐 재벌 기업들의 또 다른 로비 창구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아울러 삼성·LG·현대경제연구소 등 기존의 대기업 연구소와의 역할과 기능이 상충되기 때문에 차별화와 함께 공공성이 담보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를 위해 대기업의 이해관계나 정부의 외풍에 휘둘리지 않고, 기업 자금도 닿지 않는 독립적인 비영리 싱크탱크로 다시 태어나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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