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왕자인(王佳音) 기자 =한국 화가 민경찬(閔庚燦) 화백은 화필(畵筆)로 항저우(杭州)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소중한 발자취를 남겼다. G20 정상회의 국빈 만찬의 예복 문양을 그린 것이다. 치파오(旗袍) 예복을 장식한 삼담인월(三潭印月)과 곡원풍하(曲院風荷) 문양이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 호수의 연꽃과 저 멀리의 수양버들, 끊어진 다리 등등, 수묵이 그려진 비단의 치파오는 독특한 멋을 풍겼다.
서령인사(西泠印社) 명예사원이자 중국미술학원 국제미술교육교류협회 해외고문, 국제 서예예술연합회 한국본부 이사 등을 겸직 중인 민경찬은 G20 정상회의 개최지인 항저우와 70년이 넘는 긴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힘이 느껴졌고, 말투에는 항저우 억양이 짙게 배어 있었다. 민첩한 사고와 호탕한 웃음으로 82세라는 나이를 무색하게 만든 그는 이야기를 하다 흥이 오르면 손에 먹을 묻혀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려 보이기도 했다. 민경찬 화백, 그의 인생에는 언제나 그림이 함께 했다.
중국, 그리고 그림과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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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학교에 다녔는데 그때 성적은 정말로 형편 없었습니다. 유독 그림만 잘 그렸는데, 항상 만점을 받았죠.” 학교에는 중국의 유명 화가인 저우창구(周昌谷)의 누이가 교사로 있었다. 한 보조교사가 저우창구의 누이를 통해 저우창구로 하여금 민경찬의 그림 소질을 확인토록 한 것이 그의 그림인생 서막을 열어주게 됐다. 당시만 해도 저우창구 역시 중국미술학원의 학생이었지만, 그가 붓질 몇번 만에 생동감 넘치는 인물화를 그려내는 것을 보고 민경찬은 곧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리고는 틈만 나면 학교로 가 저우창구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1949년부터 저우창구에게 사사했죠. 훗날 스승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수업시간에 마오 주석의 측면상을 모사한 것에서 소질을 보시고 저를 제자로 받아주신 거라고요.”
민경찬보다 6살 위인 저우창구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인물화로 국제 대회에서 처음으로 상을 받은 화가다. 전통 필묵기법에 조예가 깊고, 일찍이 둔황(敦煌)으로 가 벽화를 모사하기도 했으며, 서양의 인상파와 야수파 회화 색채에서도 많은 영감을 얻었다. 주로 일상생활에 숨겨진 시적 장면을 소재로 삼았으며, 운치 넘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림뿐만 아니라 서예와 전각에도 상당한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스승 저우창구의 애정 어린 관심 속에서 민경찬은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판톈서우(潘天壽), 황빈훙(黃賓虹), 사멍하이(沙孟海), 위런톈(余任天), 루옌사오(陸儼少), 주러싼(諸樂三), 청스파(程十發), 황저우(黃胄), 린펑민(林風眠) 등 대가들과도 교류했으며, 위창궁(於長拱), 취안산스(全山石), 샤오펑(肖峰) 등 유명 화가들과는 친구의 연을 맺었다. 저우창구는 민경찬의 가능성을 확신하며 그로 하여금 미술학원 시험에 응시하도록 했다. 국적 문제로 입학에는 실패했지만 21살의 민경찬은 저장(浙江)연극단의 무대미술을 담당하게 된다.
전국 각지의 대가들을 사사
국적 문제와 경제적 제약으로 민경찬은 미술학교의 정규 코스를 밟을 수 없었다. 그는 과거의 방식대로 스승에게 직접 가르침을 청하기로 했고, 전국 방방곳곳을 돌며 각지의 대가들을 사사했다.
전통 화가들은 보수적인 것이 일반적이다. 자신의 창작활동을 누군가 지켜보는 것을 꺼려하며 대가들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고아인 데다가 거리낌 없는 성격이었던 민경찬에게 스승들 모두 창작의 순간을 감추지 않았고, 덕분에 그는 몇몇 대가의 운필과 먹 사용의 정수를 배울 수 있었다.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대가들은 다양한 운필기법을 구사하지만 그것들을 작품에서 해석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한 획을 긋는 것만 해도 붓을 세워서 밀듯이 그을 수도, 붓대를 돌리면서 흘릴 수도 있고, 붓을 움직이는 속도와 떨림의 정도, 리듬까지도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다. 어떤 예술가는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 지켜보고 있을 때면 핑계거리를 찾아 그 사람이 자리를 비키도록 한 뒤에야 중요한 부분을 처리하기도 한다.
그림에 대한 민경찬의 애착과 열정, 집념은 대가의 마음을 움직였다.
1960년대 상하이에서 머물고 있던 루옌사오는 위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들은 민경찬은 중국 정부가 외국인에게 배급한 쌀을 가지고 기차를 타고 항저우에서 상하이로 향했고, 그 길에서 루옌사오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게 됐다. 민경찬의 ‘운무전필(雲霧轉筆)’은 바로 그 때 루옌사오에게 배운 것이다.
위런톈은 신(新)저장파 회화의 주요 창시자로서, 시와 서화 모두에 능한 대가 중 대가다. 위런톈을 스승으로 모시라는 저우창구의 조언에 따라 민경찬은 술과 닭을 들고 위런톈을 찾아갔다. 그리고 사사를 청하는 연회에서 위런톈과 술잔을 기울이다가 기쁜 나머지 과음을 하고, 결국 스승의 침대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위런톈은 그러나 “이런 학생은 처음 보았다”며 오히려 쾌활한 성격의 민경찬에게 좋은 인상을 갖게 됐고, 그에게 구도를 잡는 법과 중봉(中鋒) 등을 가르쳐 주었다.
민경찬은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예술적 개성 또한 남다르다. 한번은 저우창구가 민경찬에게 산수화를 그릴 것과 사왕(四王, 중국 청나라 때 왕(王)씨 성을 가진 네명의 화가)을 모사할 것을 건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주일간 두문불출했던 민경찬의 책상에는 황빈훙의 작품을 모사한 습작만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알고 보니 민경찬은 황빈훙의 작품에 빠져 무려 10년 간을 저우창구 몰래 황빈훙 작품을 모사해왔던 것이었다. 이 일은 저우창구가 민경찬을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민경찬은 사람들 앞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즐긴다. 산수화를 그리고 발묵법을 좋아하는 그는 일찍이 장다첸(張大千)의 발묵법을 연구하면서 먹물을 떨어뜨린 뒤에도 대범하게 먹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민경찬은 루첸사오만의 구운(構雲)화법과 판톈서우의 수지화(手指畵, 손가락이나 손바닥에 먹물을 묻혀 그린 그림)를 사랑한다. 손가락으로 새우, 대나무, 매화 따위의 선면화(扇面畵)를 그리다가 손톱의 절반이 닳아진 적도 있었고, 심지어 손가락으로 운무(雲霧)에 색을 입히기도 했다.
민경찬의 산수화는 활기가 넘친다. 먹의 사용이 맑고 고우며, 복잡한 것을 없애 간결하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민경찬은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밝은 것으로 어두운 것을 표현하고, 허구로 사실을 드러내며, 중묵(重墨)과 간필(簡筆)을 연구한다. 대담한 색채 활용으로 화면에 생명력을 불어넣음으로써 남다른 풍격을 지닌 예술적 경지에 도달했다. 그의 작품은 무궁무진한 흡입력을 내뿜음과 동시에 눈부신 빛을 발산하고 있다.
“일을 함에 있어 민경찬은 항심(恒心)을 가지고 있다. 방향을 정하고 그것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기 때문에 대가가 많은 중국 화단에서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었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부지런하다. 저우창구는 ‘며칠 보이지 않으면 도화지가 산처럼 쌓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민경찬의 창의력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다. 게으름 피우는 것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다양한 필묵효과를 연구하니 새로운 기법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저종(猪鬃, 돼지갈기털), 마모(馬毛), 죽사(竹絲) 등 각종 재료를 사용해 다양한 크기, 길이의 붓이나 솔을 만들기도 하고 선지(宣紙), 피지(皮紙) 등 종이를 가지고도 다양한 시도를 한다. 또 이런 저런 방법으로 물을 뿌리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며 먹과 물이 붓 아래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실험한다. 그의 작업실에 가면 각종 도구를 볼 수 있다.” 중국미술학원 루신(盧忻) 교수는 민경찬과 그의 작품에 대해 이같이 말한다.
한국에서 뿌리를 찾다
1980년대 항저우 화단에서 가장 걸출한 청년화가로 손꼽히며 중국 예술계에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민경찬은 국제적십자회를 통해 한국의 가족 찾기에 나섰다.
1983년 민경찬은 기차를 타고 광저우(廣州)로 가 국제적십자회 네트워크를 통해 홍콩으로 출국했고, 그곳에서 한국 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48세가 되어서야 조국 땅을 다시 밟게 된 민경찬. 그는 “중국에서 산지 이미 40년이 다 되었기 때문에 항저우 말은 유창하게 할 수 있었어도 한국어는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였다.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언어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국에서의 출발은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다. 민경찬은 종친회로부터 500만원을 빌려 야심차게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한국인들이 흑백의 수묵 산수화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시회에서 팔린 작품은 10 여 개에 불과했다.
한국 시장 개척을 위해 민경찬은 다시 하루 중 10시간 이상을 작업에 매달렸다. “그동안 배웠던 모든 기법들을 각각의 작품에 응용한 뒤 그것들을 여기저기로 보내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중국 그림 스타일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국사람들은 색채가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색감이 화려할수록 인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4년 뒤에 전시회를 다시 열었는데, 그때는 100개가 넘는 작품이 팔렸습니다.” 이후 그는 한국에서 ‘백송전(百松展)’을 열었고 전시된 작품 대다수가 정부기관 및 재단에 팔릴 정도로 당시의 전시회는 큰 화제가 되었다.
가르침을 준 곳으로 돌아가다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민경찬은 사사했던 스승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그들의 작화(作畵)활동을 본 사람들 또한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특히 한중 양국의 수묵화 역사와 분위기가 달라 적합한 후계자를 찾기 어려운 상황은 민경찬으로 하여금 자신의 예술을 전승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게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가르침을 준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작품이라도 더, 그리고 학생들에게 한 가지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었죠. 결국 나는 중국으로, 항저우로 돌아왔습니다. 은혜에 보답해야 했으니까요.” 민경찬의 말이다.
2007년 민경찬은 중국행을 결정하고 항저우에서 살기로 결심한다. 시후(西湖)와 다원(茶園)이 있고, 그에게 창작의 영감과 힘을 불어 넣어주는 산과 물이 있으며,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에게 있어 항저우는 예술적 고향이었다.
항저우가 2016년 G20 정상회의 개최지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민경찬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내가 본 G20-인상(印象)항저우’ 행사에 참가한 데 이어 국빈만찬 예복의 디자인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림을 그리면서 시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몇 번이고 시후로 가 영감을 떠올렸다. “시후는 평면으로 기복이 없기 때문에 입체감을 살리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한 가지를 그리는 데 수십장의 종이를 썼습니다. 요소 하나하나를 정방형, 장방형 혹은 다른 형태로 그린 뒤 다시 새롭게 구도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죠.” 민경찬의 말이다.
항저우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낸 민경찬은 이 곳의 모든 것에 익숙할 뿐 아니라 이 곳의 거대한 변화를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G20 정상회의 개최로 항저우는 세계 무대에 올랐습니다. G20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조금이나마 힘을 보탤 수 있다는 것에 항저우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자신의 예술을 더 많은 사람에게 물려주기 위해 민경찬은 현재 민경찬박물관을 조성하고 있으며, 그의 예술학습반 또한 학생을 모집 중에 있다. 항저우 와이퉁우(外桐塢)촌에 있는 민경찬작업실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민경찬의 적극적인 노력 속에 와이퉁우촌의 많은 농민들이 한가할 때마다 그림 그리기를 배우면서 마을의 예술적 정취가 날로 짙어지고 있다.
민경찬의 창작활동은 단 하루도 쉬는 법이 없다. 많은 대가들의 정수를 익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젊은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먼저 사람이 된 뒤 그림을 그려라.’ 할 일이 아무리 많아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저우창구 스승님의 말씀이라고 그는 말했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 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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