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지난 1072년 유신헌법 제정으로 최소한의 형식적 민주주의마저 말살하고 강력한 1인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박정희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을 넘어 권력을 남용해 헌정을 유린하고 1인 독재를 한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이 부여한 권한을 비선실세로 지목된 최순실 씨에게 넘겨 국정을 농단하게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런 차이점에서 불구하고 박정희 유신 정권의 몰락 과정과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에는 중요한 유사점이 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경호실 대 중앙정보부, 군 원로파 대 군 소장파의 갈등이 악화됐다. 박정희는 하나의 권력분파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즉시 제거했다. 이런 박정희의 분할통치로 인해 유신정권은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 박근혜 대통령이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태민ㆍ최순실과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해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대힌민국을 강타하게 한 것과 대조된다.
하지만 이런 박정희도 차지철의 국정 독주는 막지 않았고 이는 박정희의 암살과 유신정권 붕괴로 이어졌다.
차지철은 1974년 8월 박종규의 후임으로 청와대 경호실장에 임명됐다. 차지철은 박정희의 신임을 등에 업고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라는 기존의 정보기관을 압도하는 별도의 정보채널을 가동시켰고 인사권과 국정 전반의 윤영에도 직접 간여해 정국을 독주했다.
1979년 2월 공화당 요직개편에도 개입해 유정회 출신의 강경파인 백두진을 국회의장으로 지명해 야당인 신민당뿐만 아니라 여당인 공화당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현재 여당인 새누리당에서 비판 목소리가 쏟아지는 것과 유사한 대목이다.
유신말기에 이르러 박정희의 권력분파 간 상호견제라는 분할통치 전략은 실패한 것. 이로 인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은 폭발했고 이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게 한 한 요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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