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정진영 기자 = 장재호의 말투는 온화했다. 전날 먹은 음식 때문인지 아침부터 심하게 시달리고 있다는 복통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을 끝낸 뒤에도 못내 남는 미련과 아쉬움을 돌이키는 걸 보면 그 차분한 말투는 비단 복통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는 본래 겸손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MBC 아침드라마 '좋은 사람'을 마무리한 장재호는 최근 아주경제 사옥을 찾았다. 귀여운 철부지에서 점차 사건의 핵심 인물로 활약해 가는 홍수혁과 달리 그를 연기한 장재호는 차분하기 그지 없었다.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죄송하다"고는 했지만 골라내는 단어나 말씨는 그가 원래도 가볍지 않을 사람임을 느끼게 했다.
6개월 여에 달하는 긴 작품을 마무리했음에도 "내게 쉬는 건 너무 사치스러운 일"이라거나 "신인에게 작품 전, 후는 거의 같다. 일상으로 돌아와서 연기를 연습하고 좋은 기회가 있을 때를 노리는 것 뿐"이라며 신인의 마인드를 꺼내어 놓는 장재호에겐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만큼 자신에 대한 평가도 냉정했다. 11월 한 달 간 독립영화 두 편을 촬영한다는 그는 "다시 탄탄해지고 싶다. 두 편으로 얼마나 변하겠느냐만 조금 더 잘하고 싶다"고 밝혔다. '좋은 사람'에서 자신의 연기에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는,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이미 여러 차례 한 후다.
아마 이런 마인드는 평탄하지 않았던 신인 시절과 그 이후 관성적인 삶에 빠졌던 시기가 만들어낸 결과물일지 모르겠다. tvN 드라마 '빠스껫 볼' 이후 이런저런 사정으로 약 3년 간 브라운관을 떠나 있었던 그는 그 시기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그때 한 친구가 전날 꾼 꿈을 이야기해주는 걸 듣고 자극을 받았다. 너무 재밌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다시 자기 입으로 해보려고 하니 안 됐던 것이다. "배우도 아닌 친구는 저렇게 잘하는데, 혼자서 배우라고 깝죽내는 나는 이런 거 하나 못 하는 구나"라는 생각에 카페를 그만두고 독립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모아둔 돈으로 생활하며 될 지 안 될 지 모르는 캐스팅에 매달리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들이 쌓여 새로운 소속사를 만났고 아침드라마에서 비중 큰 인물까지 연기하게 됐다. 이 시기는 흐트러짐 없는 성실함이 얼마나 큰 무기가 될 수 있는가를 장재호에게 알려 줬을 터다.
이 배우가 특별한 건 겸손과 냉정에 열정이 더해져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 말하지 않고 무턱대고 독립영화 두 편 촬영 스케줄을 잡아온 것부터 그렇다. "회사에서 허락을 안 해 줬으면 난감할 뻔했는데 다행"이라는 말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그는 이 두 작품에서 각각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착하면서 사이코패스처럼 변해가는 남자, 파멸해 가는 디자이너 역을 맡았다.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보드타는 거나 게임하는 게 제일 재밌는 사람들이 있잖나. 나한테 제일 재밌는 건 연기"라는 답이 돌아왔다.
"관객들은 항상 진화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관객들의 눈에 맞추려면 조금 더 사실적이고 리얼한 연기를 해야겠죠. '그런 연기는 무엇일까'를 많이 고민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런 고민을 하고 싶어요.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세련된 배우들, 내 손자에게도 당당히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2008년께 연극부터 시작했으니 배우로서 아주 짧은 연차는 아니지만 장재호에게 현재는, 다시 시작이다. 군대에 있을 때 특공무술시범단까지 했는데 오디션에서 보여줄 수 있는 무술 하나 없는 게 부끄러워서 킥복싱을 등록하고, 한 달에 한 편씩 꾸준히 독립영화를 촬영해 필모그래피를 늘린 건 순전히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열정이 쌓여 배우 장재호에게 또 다른 문을 열어줄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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