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역사] 2002년 '효순이·미선이 사건' 발단... 2008년 '광우병 파동' 70만명 집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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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11-27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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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5차 촛불집회가 열린 가운데 한 시민이 촛불을 들고 있다. [사진=조득균 기자]


아주경제 조득균 기자 = 지난 26일 열린 '5차 촛불집회'는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전국적으로 190만 여명(서울 150만명·지방 40만명)의 참가자들이 운집하면서 헌정 사상 최대 규모라는 역사를 새로 썼다. 이전 최대 규모 집회는 지난 12일 열린 '3차 촛불집회'로 주최 측 추산 100만 명(경찰 추산 26만 명)규모였다.

폭력적 시위와는 다른 문화제 형태의 평화적 시위인 촛불 집회가 지금의 모습을 하기까지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우리와 함께 해왔다.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장엄한 대규모 촛불집회는 2002년 일어난 이른바 '효순이·미선이 사건'으로 분노의 물결이 일시에 전국을 강타하면서 시작됐다.

최초의 '촛불집회'는 1992년에 발생했다. 당시 PC통신인 하이텔이 유로화로 바뀌면서 이를 반대하기 위한 시위에 촛불을 든 네티즌들이 등장한 게 시초다. 그러나 워낙 소규모로 진행됐기 때문에 이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대규모 촛불집회는 2002년 '효순이·미선이 참변 사건'이다. 그해 6월 13일 경기도 양주시에서 갓길을 걷던 두 여자 여중생(신효순.심미선)이 주한미군의 장갑차량에 깔려 숨지는 참변이 발생했다. 당시 미군 측에서는 해당 사건이 단순한 교통사고에 불과하다는 거만한 태도를 보이며 장갑차를 운전했던 미군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당시 이 사건이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와 '제16대 대통령선거'의 열기에 묻히자 한 네티즌이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 광화문을 우리의 영혼으로 채우자"라며 촛불행사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 뒤 11월 30일 또래의 중학생뿐만 아니라 나이든 어르신들, 딸과 아들을 둔 부모까지 양손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죄를 저지른 주한 미군은 국내 법 대로 처벌할 수 없고, 미국으로 송환돼 미국의 법대로 심판 받도록 하는 SOFA(주한민군 주둔군지위협정) 협정에 대한 개정 목소리도 함께 터져 나왔다.

집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한때 한국과 미국 사이에 외교적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의 폭력적 시위와는 다른 평화적 시위를 유지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

아울러 '깃발대중'이라고도 표현되었던 운동권 집단이 촛불시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면서 촛불집회의 태초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두 번째 대규모 촛불집회는 2004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전국적으로 열렸다. 주최 측 추산으로 20만명, 경찰 추산 13만명의 인파가 몰렸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해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성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지금의 새누리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열린우리당이 빠진 채 진행된 본회의에서는 찬성 193표(반대 2표)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이에 국민들은 국회를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당일 1만2000여 명으로 거리로 나왔고, 가결 다음날에는 7만여 명이 집결했다. 2004년 3월 중순 시작된 시위는 5월 헌법재판소가 탄핵 기각 결정을 내릴 때까지 전국에서 크고 작은 단위로 이어졌다.

이후 세월이 흘러 2008년 한미 FTA로 불거진 '미국산 소고기 수입 재개 협상 반대' 촛불집회에 70만 명(경찰 측 수산 8만명)의 참가자들이 몰리면서 정점을 찍었다. 당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그해 5월부터 두달 여간 진행된 집회는 300여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됐다. 72시간 릴레이 시위처럼 장시간에 걸친 마라톤 시위가 등장했는가 하면 촛불문화제로 시작해 다음날 새벽까지 경찰과 대치하는 철야시위도 일상화돼 가는 분위기였다.

당시 광우병은 물과 공기로도 전염될 수 있다는 괴담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공포감에 휩싸인 국민들을 더욱 거리로 나오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중고등학생들 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은 광우병에 대한 공포감을 바탕으로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충실한 설명이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FTA를 추진했다며 분노를 표출했다.

또 집회에 참여했던 청년 세대들은 촛불시위와 더불어 춤추고 노는 흥겨운 축제의 장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들에게 투쟁과 놀이는 하나였고, 물리적 힘을 문화적, 예술적 상상력과 재기발랄함으로 이어나갔다. 아울러 온라인에서의 왕성한 활동을 벌이면서 여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를 통해 당시 이명박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졸속 추진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수입을 완전히 중단시키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이뤄낸 의미 있는 성과였다.

이밖에 2011년에는 대학생들의 반값등록금 촛불집회가 있었다. 집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그해 5월경이며, 6월 시점까지 최대 수천명에서 만명 이상의 인원이 참여했다. 가장 최근에는 2014년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 집회가 있다. 희생자들을 추모한 집회 열기는 뜨거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도 국민들은 사회적 현안이 생길 때마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서 민심을 표출하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로 불거져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2008년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서울 종로에서 가두행진을 한 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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