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의 유성영화를 찍었고, 흑백부터 칼라까지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60년대 이후 홍콩 무협영화의 전성기를 열었다. 20여년간 1000여편의 영화를 찍었고, 그의 영화관은 200개에 달했으며, 하루 관객이 100만명에 달할 때도 있었다. <강산미인>, <양귀비>, <양산백과 축영태> 등의 초기 성공작은 물론 <외팔이 검객> 3부작, <13인의 무사>, <소림사> 등의 작품도 흥행에 성공했다. 쇼 브라더스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는 ‘이한상’, ‘호금전’, ‘장철’ 등이 있으며, 배우로는 장다웨이, 디룽, 왕위, 로례 등의 스타를 배출했다.
쇼 브라더스는 홍콩 동부 신제(新界), 장쥔아오(將軍澳)에 대규모 종합 촬영소를 만들어 영화 제작의 인프라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기여했다. 아울러, 1971년에는 쇼 브라더스를 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시키는 등 모든 분야에서 항상 앞서갔다. 그의 이름은 소일부(邵逸夫, 샤오이푸, Sir Run Run Shaw, 1907-2014)다.
그는 변화에도 능했다. 1970년에 설립된 후발 주자 ‘골든 하베스트’가 이소룡, 성룡, 홍금보, 원표 등의 스타를 배출하면서 홍콩무협영화계를 석권하고, TV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영화를 위협하자 그는 발 빠르게 방송사(TVB)를 설립하여 드라마 분야에 진출했다. 새로운 미디어의 미래를 간파했던 것이다. 그리고 방송과 드라마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했다.
그는 영화처럼 로맨틱한 사랑을 했다. 30세와 90세에 두 번 결혼했다. 싱가포르에서 사업파트너의 애인이었던, 다섯 살 연상의 여자와 오랜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녀와 50년 해로했다. 첫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10년이 지난 해, 그의 나이 90세에 그는 재혼했다. 45년간 그의 사업을 뒷바라지 해줬던 28세 연하의 여자였다. 90세와 62세의 늙은 신랑, 늙은 신부였지만 가슴만은 여전히 뜨거웠다고 한다. 그는 102세의 나이에 두 번째 부인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비로소 경영 일선에서 은퇴했다.
그의 인생은 드라마틱하다. 그가 만들었던 영화나 드라마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고교 졸업 후 젊은 나이에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의 사업에 뛰어 들었다.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부를 일궜다. 영화와 방송이라는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선구자적 기질을 발휘했으며 항상 새 길을 개척했다. 사랑에 있어서도 진실하고 로맨틱하고 열정적이었다. 그는 어렵게 번 돈을 혼자 쓰지 않았다. 대학의 우수 인재 양성을 위해 기부를 하는 등 사회에 환원했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 덧 100세를 훌쩍 넘겨 107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존경받는 부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편안한 노후와 행복한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얻어지는지 가르쳐 주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