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휴대폰 메이커인 S전자.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시제품 품평회가 열렸다. 이태리 명품 브랜드 P사의 가죽제품 질감을 살린 케이스 디자인이 포인트였다. 원하는 가죽 질감이 100% 구현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디자인 개발자는 출시를 늦추더라도 질감을 100% 살려야 한다고 했고, 마케팅 담당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맞섰다. 총괄 책임을 맡은 본부장은 고민 끝에 이같이 말했다. “두 분이 상의해서 결정해 주세요.”
디자이너와 마케터의 논쟁은 평행선을 달렸다. 최종 결정의 책임이 없는 두 사람은 자기 입장만 앵무새처럼 주장할 뿐이었다. 그 사이 경쟁사에서 같은 컨셉트의 신제품이 출시됐고, 이 제품으로 양사의 시장 판도가 뒤집어졌다.
있을법한 가정이다. 다행히 실제에선 이와는 반대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책임자는 신속히 시제품을 수거해 폐기했고, P사의 가죽 질감을 완벽히 살린 제품을 만들어 히트를 쳤다.
“두 분이 결정해 주세요.” 조직생활을 하다보면 이같은 말을 심심치 않게 하거나 듣는다. 언뜻 구성원의 자율의사를 존중하는 말 같지만 이면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의사결정의 공을 아랫사람에게 떠 넘기려는 의도인 경우가 많다. 양측의 의견이 대립할 때 자로 잰 듯 정확히 가운데를 가르는 결정이란 현실에선 있을 수 없다.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은 어느 한쪽을 외면한다는 말과 같다. 이럴 경우 마음 약한 리더는 너무나 쉽게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미명의 커튼 뒤로 숨는다.
앞서 예를 든 일처럼 한 회사의 사활을 가르는 큰 사건일 경우엔 오히려 문제의 심각성이 덜할 수도 있다. 사후 책임소재가 명확해 바로잡는 것 또한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면 아래에 가라 앉아 평상시엔 잘 드러나지 않는 일상의 업무들이다. 결정 권한이 있는 상급자가 공을 밑으로 넘기면 밑에서는 소모적인 핑퐁 게임만 하게 되는 일이 다반사다.
이른바 ‘터프가이(Tough Guy)’의 시대다. 세계는 그를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앞다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앞에 줄을 선다. 트럼프가 눈을 한번 흘기자 GM과 도요타, 현대차 등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들이 현지 투자를 약속하고 나선다. 아베와 마윈이 서둘러 달려가 미국 내 일자리 창출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미국인들이 트럼프에 열광하는 것은 그가 소위 점잖은 리더라면 하기 힘든 결단을 시원시원하게 내려주기 때문이다. 소통형 리더인 버락 오바마의 퇴장에 존경을 보냈던 미국인들은 이제 트럼프의 지휘봉에 박자를 맞추고 있다. 트럼프에게 쏟아지는 게 존경이 아니라 아직은 갈채 수준일 지 모르지만 트럼프는 적어도 리더로서 팔로워인 미국인들이 가려워하는 곳을 정확히 알고 있다. 일단 세계 1등 국민인 미국인이 잘먹고 잘살자는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트럼프의 등장으로 이제 글로벌 패권경쟁은 체급이 달라졌다. 그에 따라 격투 방식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트럼프 취임 후 당장 미국은 중국은 물론 한국을 패키지로 환율조작국으로 지정, 45% 고율의 보복관세를 부과할 태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는 트럼프가 옳고 그른지를 따져주는 논객형이 아니라 헤비급 플레이어들의 격전 속에서 우리를 안전지대로 이끌어주는 결단형이다.
이같은 거대한 흐름속에서 회사에서부터 국가까지 크고 작은 하나하나의 조직에서도 리더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 책임과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중요한 결정을 하고 엑셀레이터를 밟는 리더가 비록 실패할지언정 제대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
'튀는 돌이 정맞는다'는 말이 성공 10계명의 리스트에 있는 우리 사회 리더들은 불행히도 결단이란 학습에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면 후세들은 지금의 우리를 냉정히 평가할 것이다. '욕을 먹지 않기 위해 아무런 결단을 하지 않는 리더는 무책임하고 무능하며 심지어 사악했다'고.
오는 20일(현지시간) 트럼프가 백악관 키를 받는다. 게임 스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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