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규탄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든 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제공]
아주경제 박상훈 기자 ="자아가 무너져내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이 됐다. 어릴 때부터 디자인만 바라보며 내 꿈을 이루길 고대해 왔지만 이제는 디자인이 너무나 싫다. 왜 피해자가 꿈을 포기해야 하나."
지난 7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피해자 A(28)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같이 말했다.
유명 편집디자인회사 신입사원이던 A씨는 지난해 5월 회식 자리에서 선배 2명으로부터 성희롱·성추행을 당했다. 이후 A씨는 스트레스 등으로 회사에서 쓰러졌고, 그의 피해 사실이 회사에 알려지게 됐다. 회사의 대응은 상식 밖이었다. 가해자들에게 수개월 감봉의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반면 A씨에겐 해고를 통보한 것. 사측은 A씨가 5~10분 지각했다는 등 업무태만을 그 이유로 들었다. A씨가 이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폭로하자 사측은 그를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고소했다.
정신적·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A씨는 같은 해 8월 온라인에 유서를 올리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자 사측은 A씨를 명예훼손 및 업무방해로 또 다시 형사고소했다.
A씨는 이후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에 가입해 법률대응을 해 왔고, 지난 2일 서울북부지법은 사측의 1차 고소에 대해 '성폭력 피해당사자가 허위사실을 유포해 회사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는 "1차 고소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피해자의 일상은 완전히 무너졌고, 회사의 형사고소로 피해자는 공황 장애까지 얻게 됐다"고 밝혔다. 실제로 A씨는 지난 10개월간 중증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 등에 시달리며 지금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이 회사가 지난달 23일 국가인권위원회의 2017년 인권잡지 제작 및 발송 담당 업체로 선정됐다는 점이다. 김환균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 위원장은 "성폭력 피해자를 해고·고소한 회사가 인권잡지를 만든다는 사실이 참으로 염치없다"고 지적했다.

지난 7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해당 업체를 규탄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세중 전국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장, 김린 여성 디자이너 정책연구모임 'WOO'대표, 김환균 전국언론노조 위원장, 박진희 전국언론노조 출판노조협의회 여성위원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제공]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가 실시한 '2016 출판계 성폭력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업무와 관련해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응답한 비율은 68.4%였지만, 이 가운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응답한 비율은 77.3%나 됐다. 출판계를 비롯한 문화·예술계 내 '침묵의 카르텔'이 성폭력 피해자들의 정당한 문제 제기를 묵살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박세중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장은 "이번 일은 특정 회사·업계만의 일이 아니다"며 "성폭력 피해 고발로 우리와 면담을 진행한 한 회사는 '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한 우수문예지 출판업체인데, (당사자가)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피해자와 언론노조의 사과 요구, 출판계 내의 자성 목소리 등이 이어지자 해당 회사는 지난 8일 뒤늦게 누리집에 "성추행 사건에서 피해자의 아픔을 헤아려 신중하게 처신했어야 함에도 두 차례의 고소를 강행했다"며 "이번 사건을 깊이 반성 중"이라는 사과문을 올렸다.
이 회사는 또 "일차적으로 피해자에게 공식으로 사과하고, 남은 형사고소 건을 모두 취하하는 등 피해자가 고통을 치유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밝혔다. 회사 대표이사의 대외활동·강의 중단, 최근 수주한 국가인권위원회 인권 잡지 제작 중단 등도 함께 약속했다.
이에 언론노조 측은 "말로만 사과를 해서는 안 된다"며 "해당 업체는 즉각 요구 사항을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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