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촛불집회가 열리지 않는 세상을 꿈꾸면서도, 설날연휴기간 촛불집회가 열리지 않았을 때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래도 좋다. 촛불집회가 열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기억을 정리하다 보니, 각 촛불집회 때마다 특색이 있어서 좋았다.
2차 때 놀랐던 것이 고등학생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장면이었다. 너무 똑똑한 발언들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고 백남기 농민의 영결식이 있었던 날이다.
3차 때도 학생들의 참여가 점차 늘어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서울 도심을 가득 메운 사람들 때문에 취재가 쉽지 않아 대한문에서 광화문 광장으로 가는 길은 길을 빙 둘러 가야 했다. 정동길도 가득 메운 시민들의 모습이 참, 좋았다.
4차 때는 부쩍 늘어난 아이들의 모습에 오래 눈길이 갔다. 5차 때는 청와대 앞길이 처음으로 열렸다. 청와대로 행진하는 발걸음이 씩씩했고, 촛불이 횃불로 승화하기도 했다.
12월이 시작되자마자 시작된 6차는 정말 장관이었다. 광화문광장에만 160만 명이 모였다. 숨을 쉴 공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다른 곳을 둘러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청와대 인근 100미터까지 행진했고, 그 선두에 세월호 유가족들이 섰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촛불시민들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울먹였다.
7차는 축제였다. 전날 국회에서 탄핵이 가결되었다. 가수 마야의 노래가 오래 기억됐고, 최순실 게이트를 풍자하는 것이 예술적 수준까지 올랐다.
8차는 다소곳한 풍경이었다. 촛불혁명의 완성이 점차 성숙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9차는 하야크리스마스로 이뤄졌다. 방송인 김제동의 ‘헌법강의’가 광화문광장을 채웠다. 10차는 한바탕 축제 형식이었다. 송박영신, 박근혜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자는 의미로 열린 10차 촛불집회는 도심을 행진하는 발걸음이 묵은해의 나쁜 기억을 걷어찼다.
11차 때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집회였다. 집회 내도록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생존자 학생들이 공식 무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고, 유가족들과 한참동안 안고 있으며 그동안의 아픔을 씻어내고 있었다. 한바탕의 씻김굿이었다.
12차는 고 박종철 열사를 기억하는 날이기도 했다. 정말 추운 날씨여서 중무장을 하고서도 광장은 너무 춥기만 했다. 그래도 같이 하는 시민들이 있어 행복했다.
13차는 눈까지 내렸다. 사람들이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14차 촛불집회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참가자들이 다시 광화문광장을 채웠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에 대한 우려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15차는 다시 100만 명을 향해 가는 교두보를 확실하게 다지는 자리였다. 차가운 날씨도 더 이상 참가자들을 지치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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