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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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2-1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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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적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전투경찰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車一赫)은 빨치산 토벌을 함에 있어서 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담력(膽力)이 셌음을 의미한다.

 지략에 바탕을 둔 판단력도 타(他)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빨랐다. 차일혁의 경찰부대와 함께 종군하며 취재했던 전북일보의 김만석(金萬錫) 기자는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을 단 한마디로 평가했다. “겁이 없다”였다. 1951년 4월 어느 날 김만석 기자는 차일혁과 함께 야간 순찰을 위해 헤드라이트를 켜고 정읍을 향해 갔다. 일순(一瞬), 김 기자는 놀랬다. 야간에 헤드라이트를 훤히 켜고 달리는 경찰 지휘관차는 잠복해 있는 빨치산들에게 ‘좋은 먹이 감’이 되기 십상이었다. 순간적으로 “빨치산이 봤다면 죽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동물적 감각에서 나온 인간의 삶에 대한 본능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빨치산들은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켜고 가는 차일혁의 차를 공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가 궁금했다. 김 기자가 나중에 들은 바로는 “당시 그곳에는 수많은 공비(共匪)들이 숨어 있었는데, 불도 끄지 않고 너무나도 대담하게 지나가기 때문에 기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차일혁의 담력과 기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보통 사람이면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렇다고 무모한 행동도 아니다. 적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미리 예측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전략적 지혜’가 돋보였을 뿐이다. 이는 김만석 기자가 죽은 뒤에 공개된 그의 비망록(備忘錄)에 쓰여 진 말이기 때문에 믿음이 간다. 차일혁에 대한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서슴지 않고 말했던 김만석 기자의 언행에 비추어볼 때 사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차일혁 부대의 처녀 출전인 구이(九耳)작전에 종군했던 전북일보의 이윤수 기자도 차일혁의 ‘대담한 지휘와 전투행동’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윤수 기자는 전북일보 박용상 사장과 같은 부안군 하서면 출신이라는 인연으로 사회부에 입사한 새내기 기자였다. 당시 편집국장 오명순의 지시로 이윤수 기자는 제18전투경찰대대의 전투 상황을 취재하게 됐다. 빨치산 토벌에 대한 회사의 지시도 있었지만 호기심도 발동되어 따라간 토벌작전은 그의 상상을 뛰어 넘었다. 구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이윤수 기자는 구사일생으로 겨우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투현장에서 이(李) 기자의 눈에 띄는 것은 전장을 압도하는 차일혁의 독특한 전투지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압권(壓卷)이었다.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전투를 지휘하는 차일혁은 마치 전쟁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몰라 노심초사하던 이 기자와 달리 차일혁은 냉정을 유지한 가운데 침착하게 지휘했다. 전투가 끝난 후 이윤수 기자는 선배인 김만석 기자에게 놀라움으로 가득 찬 전투상황을 생생하게 전했다. 화제의 중심은 차일혁이었다. 적진지를 공격할 때 중화기부대 대원들은 우왕좌왕했지만 차일혁은 침착하게 지휘했고, 총알이 빗발치는 데도 차일혁은 그것을 즐기며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심지어 그 긴박한 전투상황에서 날아오는 적의 총알을 세고 있었다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전투 중 날아오는 화살도 아니고 총알을 셀 수 있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일혁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렀으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차일혁은 대담스럽게 행동했다.

 차일혁은 빨치산의 숫자는 많은데 날아오는 총알이 30여발 밖에 안 되는 것을 알고, 그들이 가진 총의 숫자는 30여정 밖에 안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많은 전투를 경험했거나 어지간한 담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군시절 차일혁은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래서 전투에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구이작전에서 보여준 전투행동 및 지휘는 범인(凡人)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윤수 기자가 전한 차일혁의 ‘전투기행(戰鬪奇行)’은 계속됐다. 전투 중 자신을 보호하는 보신병(保身兵)이 빨치산이 쏜 총탄을 맞고 쓰러지자 차일혁은 보신병의 M1소총을 집어 들고 적진을 향해 총을 쏘며 적정을 살폈다고 했다. 도대체 겁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보신병이 빨치산이 쏜 총탄을 맞고 죽을 정도면 상황이 아주 불리한 상태인데도, 차일혁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부하들을 독려하며 자신이 앞장서서 빨치산과 전투를 치렀다. 차일혁의 그런 행동들은 마치 “전장에서 전투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전투가 끝난 뒤 빨치산 50명을 사살했는데, 과연 그가 예측한대로 총은 30정(挺)밖에 나오지 않았다. 전투 중에 빨치산들이 쏜 총알을 세어가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총이 몇 정인지를 정확히 알아맞혔다는 것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차일혁은 그 정도로 담력이 셌고, 전세를 읽는 판단력도 그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이 또한 김만석 기자가 차일혁을 수행하며 취재했던 이윤수 기자의 말을 직접 듣고 비망록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 정도면 가히 ‘전투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스개로 뛰어난 군인들은 “지도만 보고도 그 속에서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산새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차일혁은 날아오는 적의 총알만 보고도 총이 몇 정이고 적의 숫자가 얼마인지를 정확히 알고 전투를 지휘했다. 새삼 그의 능력과 담력에 감탄만 나올 뿐이다. 그의 부하들이 신뢰하고 그와 함께 싸웠던 상관들이 그를 데리고 가려고 했던 것에 수긍이 간다.

 세계 어느 전사(戰史)를 봐도 날아오는 적의 총알을 세가며 적이 가지고 있는 총의 숫자를 맞췄다는 군인이나 지휘관을 들어 본적이 없다. 처음 듣는 말이다. 말 그대로 금시초문(今始初聞)이다. 차일혁이 전투에서 승리했던 비결은 많았다.

 하지만 차일혁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커다란 요인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담력과 전투현장의 판세를 읽고 대처하는 판단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투지휘 모습을 지켜보고 내린 이윤수 기자의 차일혁에 대한 평(評)은 “냉정하고 무척 침착한 사람”이었다. 그 이면에는 적을 두려워하지 않은 차일혁의 타고난 굳은 심지(心地)가 있었다. 그것은 담력이었다. 적을 두려워하지 않은 담력은 무인(武人)에게는 커다란 복이 아닐 수 없다. 위급한 상황일수록 지휘관의 담력과 판단력은 전투에서의 승리는 물론이고 전쟁의 승패도 가늠하게 된다. 담력이 없거나 판단력이 결여된 지휘관이나 지도자는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 우유부단함으로써 전투에서 지거나 대사(大事)를 그르치는 경우를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중국 삼국지를 보면, 조조(曹操)는 100만 대군을 몰고 와서도 유비(劉備)의 본진으로 연결되는 장판교에서 홀로 버티고 있는 장비(張飛)를 보고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무슨 술수를 쓰지 않았는가 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장면이 있다. 이로 인해 유비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고, 조조는 통일의 기회를 잃고 유비 및 손권(孫權)과 함께 천하를 3등분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조조는 결정적인 기회에 늘 ‘제 꾀’에 넘어가는 소심함으로 대사를 그르친다. 조조의 소심함은 결국 라이벌이었던 유비나 손권이 천자(天子)의 위(位)에 오른데 반해 그는 왕(王)에 머무르는 결과를 초래케 했다.

 반대로 6·25전쟁 초기 서울이 예상외로 빨리 함락되면서 6월 28일 한국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맡게 된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전황을 살피기 위해 그 다음날인 6월 29일 비가 쏟아지는 악천후와 북한공군에 의해 폭격당하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수원비행장에 내려 한강방어선을 시찰한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전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긴급조치로 미 지상군 파견을 워싱턴에 요청하게 된다. 미 지상군이 한국전선에 신속히 발을 내딛게 된 배경이다. 이는 대한민국을 최대의 위기에서 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때도 태풍에 맞서는 비범한 행동을 보였다. 범상치 않은 담력과 군인으로서 타고난 직감적 판단력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6·25전쟁 최대의 위기인 낙동강 전선에서 최영희(崔榮喜,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국방부장관 역임) 제15연대장은 2군단장 유재흥(劉載興, 합참의장·국방부장관 역임) 장군의 명령으로 영천의 전략적 요충지 화산(華山)을 공격하여 탈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최영희 연대장은 새벽에 기습공격으로 화산을 점령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적의 대규모 반격이었다. 어렵게 확보한 화산을 적에게 내줄 수는 없었다. 묘안을 짰는데, 그것이 기기묘묘(奇奇妙妙)했다. 사방(四方)에서 잘 보이는 곳에 병풍을 치고 그 앞에 사기로 된 밥그릇에 밥상을 차려놓고 식사를 했다. 북한군은 적장(敵將)의 그런 모습을 보고 뭔가 함정이 있는 줄 알고 감히 공격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전투의 흐름과 적의 능력을 파악하지 못하고는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그 이면에는 누구도 범접(犯接)하지 못할 담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가 적을 앞에 두고도 동요하지 않고 태산처럼 행동했던 것을 부고 세인들은 그를 ‘부동여산(不動如山)’이라는 별호(別號)를 붙여 줬다.

 차일혁도 전장에서 이들 영웅들 못지않은 담력을 과시했다. 뛰어난 판단력도 함께 보여줬다. 날아오는 적탄을 세워가며 싸우는 지휘관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그는 전투 중이거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결코 냉정을 잃지 않는 침착한 지휘관”으로 알려졌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담력과 후천적으로 얻은 군사지식 및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무인에게 담력은 보배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자신이 갖고 싶다고 해서, 또 원한다고 해서 쉽게 얻어지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지닌 값어치는 더욱 소중하다 하겠다. 고금동서(古今東西)의 전사를 보면, 담력과 판단력이 뛰어난 지휘관은 전쟁에서 전혀 위태롭지 않았다. 그러기에 적을 두려워하지 않은 담력은 지휘관이 갖추어야 될 최고의 가치이자 덕목(德目)으로 예로부터 높게 평가받았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과 전투에서 실패한 패장(敗將)간의 차이는 결국 ‘담력이 있고 없는 유무(有無)’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차일혁이 빨치산토벌에서 매번 성공적인 작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뭇 영웅들처럼 적을 두려워하지 않은 담력과 판단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차일혁을 전투경찰 중 전공을 가장 많이 세운 전쟁영웅의 반열에 올려놓게 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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