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만 되면 온 나라가 3ㆍ1 만세운동을 재현하며 3ㆍ1 만세운동를 기리지만 3ㆍ1 만세운동은 명확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3ㆍ1 만세운동의 가장 큰 한계는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의도를 당시 민족대표 33인뿐만 아니라 대다수 민중들도 인식하지 못하고 과신했다는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3ㆍ1 만세운동의 한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모든 약속민족을 위해 제창된 것이 아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즉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을 위한 식민지 재분할 정책에 불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 등도 당시엔 일본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였다.
민족대표 33인이 3ㆍ1 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민족대표 33인은 자주적인 독립 쟁취가 아닌 일본과 미국 등 강대국에 독립청원을 하는 데에 치중했다. 그리고 이들은 3ㆍ1 만세운동 과정에서 전혀 역할을 하지 않았고 일경에 자수해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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