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역사’윌슨 민족자결주의 한계 인식 못하고 과신,33인은 일경에 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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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3-0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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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주년 3.1절 행진하는 민족대표 33인의 영정 (서울=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제98주년 3.1절인 1일 서울 종로에서 독립유공자유족회 등 독립 단체 관계자들이 민족대표 33인 영정 등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2017.3.1 kane@yna.co.kr/2017-03-01 12:50:31/ <저작권자 ⓒ 1980-2017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저작권자 ⓒ 1980-2017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아주경제 이광효 기자=1일 98주년 ‘3.1절’을 맞아 1919년 3ㆍ1 만세운동의 한계에 대해서도 반성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3.1절만 되면 온 나라가 3ㆍ1 만세운동을 재현하며 3ㆍ1 만세운동를 기리지만 3ㆍ1 만세운동은 명확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3ㆍ1 만세운동의 가장 큰 한계는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의도를 당시 민족대표 33인뿐만 아니라 대다수 민중들도 인식하지 못하고 과신했다는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3ㆍ1 만세운동의 한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모든 약속민족을 위해 제창된 것이 아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즉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을 위한 식민지 재분할 정책에 불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 등도 당시엔 일본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였다.

98주년 ‘3.1절’을 맞아 민족대표 33인의 한계에 대해서도 냉정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민족대표 33인이 3ㆍ1 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민족대표 33인은 자주적인 독립 쟁취가 아닌 일본과 미국 등 강대국에 독립청원을 하는 데에 치중했다. 그리고 이들은 3ㆍ1 만세운동 과정에서 전혀 역할을 하지 않았고 일경에 자수해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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