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1905년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총 64회 7400여 명의 이민이 계속되었다.
하와이에서는 19세기 초 사탕수수농업이 크게 발달하여 경제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자체 노동력의 부족으로 거의 외국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하와이 노동이민은 중국인(1852)과 일본인(1868)에 이어 20세기 초 한인 이민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특히, 알렌의 추천으로 고종황제로부터 하와이 이민사업 책임자로 임명된 데쉴러는 이민모집을 위해 내리교회 부근에 동서개발회사(East-West Development Company)와 이민자의 재정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한 데쉴러은행(Deshler Bank)을 설립했다.
하와이 첫 이민단은 유민원 총재(閔泳煥) 명의의 집조(執照:여권)를 발급받고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를 출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태평양 횡단선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한인 이민자들은 오아후 섬 와이아루아(Waialua) 농장의 모쿨레이아(Mokuleia) 캠프에서 본격적인 이민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하루 10시간씩 노동을 했다.
월급은 한 달에 17달러 정도였고 여자나 소년들은 하루에 50센트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낯선 환경과 고된 노동 속에서 힘들게 번 돈을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그 정신적 구현이 인하대학교를 설립하는 것에도 반영되었다. 인천(仁川)과 하와이(荷蛙伊)의 첫 자를 따서 ‘인하(仁荷)대학교’의 교명이 탄생했듯이 인하대학교의 설립자금에는 하와이 교포들이 보낸 하와이 한인 기독학원(1918) 부지 매각대금(15만 달러)과 정부의 지원금(100만 달러) 및 시민들의 성금이 포함된 것이었다.
인하대학교의 설립이 초기 이민자들의 정신적 귀환을 담은 것이라면,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008년 6월 13일 인천 월미도에 개관한‘한국이민사박물관’은 오늘을 사는 이민의 후손과 국내인을 하나로 연결하는 한민족공동체의 실제적인 귀환을 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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