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민간이 세운 제녕학교… 인천신상협회의 애국계몽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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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3-15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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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박흥서 기자 =1903년 6월 설립된 제녕학교(濟寧學校)는 인천 최초로 민간인이 경영하는 학교였다.

제녕학교 설립은 인천의 유지 서상빈(徐相彬)이 주도하였고, 김정곤(金貞坤)이 도움을 주었다.

인천 태생의 서상빈은 1889년 개항 초기에 인천감리를 지낸 서상집(徐相潗)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상인단체이자 상공회의소의 전신인 인천신상협회(仁川紳商會社)를 설립하여 실질적인 사장 역할을 했다.

제녕학교 설립을 주도한 인천신상협회의 장정(章程)[사진=인천시]


그는 인천이 국제 무역항이자 서울의 관문인 산업 도시라는 것을 알고, 인천의 일꾼에게 신학문과 영어를 가르치고자 하였으나 학교가 없는 것에 대해 고민하였다.

때마침 러일전쟁 당시 인천 앞바다에서 침몰한 러시아 군함 바리야크 호를 인양하여 거액을 번 김정곤이 제녕학교 설립에 재정적 지원을 했다.

이와 같이 제녕학교 설립에는 인천신상협회와 지역 유지들이 힘을 모았다.

특히 민족 상권을 지켜내기 위해 설립된 인천신상협회가 애국계몽활동의 일환으로 학교 설립에 기여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1903년 6월, 내동 강응원 양조장 자리 근처에 초가 30여 평의 학교 건물을 건립하였다.

신식 건물이 아닌 초가의 형태였고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으나 개교 당시 다른 학교들과 비교할 때 적지 않은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수업은 주간 수업(晝學)과 야간 수업(夜學)이 있었는데, 주학에는 관립외국어학교 교관들이, 야학에는 인천해관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신학문과 영어를 가르쳤다.

제녕학교는 학생이 120명에 달할 정도로 발전하였으나 개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학교 운영 경비를 전부 제공하고 있었던 인항전운회사(仁港轉運會社)가 1906년 이후로 회사 재정이 넉넉하지 못하여 교비를 마련하기 어려운 지경에 봉착하였다.

인항전운회사의 부사장 김정곤이 당시 제녕학교의 교감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전 사원에게 학교를 유지할 방도를 강구하도록 하였고 여의치 않을 때에는 사재를 내어 학교를 운영하였다.

폐교 직전 제녕학교 기사 (황성신문, 1907.3.5.)[사진=인천시]


덕분에 학교가 활성화되는 듯 하였으나 결국 1907년 6월 1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통합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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