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잠자는 사자를 깨우지 말라. 잠에서 깨면 귀찮아질 테니까”
1996년 중국 신세대 지식인들은 1000만권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中國可以說不)'에서 온몸의 솜털이 일어서는 듯한 경고의 말을 내뱉었다.
“사자(중국)가 조련사(서구열강)보다 훨씬 강하다. 그런 사실을 조련사는 알지만 사자는 모른다. 그러나 사자가 그 사실을 알아버렸는데도 조련사가 예전처럼 사자를 길들이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200여년전 나폴레옹이 깨어날까 봐 노심초사하던 잠자는 사자, 중국이 깨어나 서구열강을 귀찮게(?) 한지 이미 오래다.
그렇다면 중국이 깨어나기 이전, 누가 어떻게 중국을 수천 년 동안 잠자는 사자로 만들었던 걸까?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황제는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룩한 진시황(秦始皇·재위 B.C.246~210년)과 고대 전제지배 체제를 완성한 한무제(漢武帝·재위 B.C.141~87년)다. 진시황과 한 무제가 없었다면, 중국의 과거나 오늘은 있을 수 없을 만큼, 이 두 황제가 중국사와 동양사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고 결정적인 것이다.
진시황은 승상 이사(李斯)의 건의와 한비자(韓非子)의 법가학설에 따라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를 실시했으며, 국토뿐만 아니라 문자·화폐·수레의 바퀴까지 통일했다. 북방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연결 수축하고, 북방의 흉노를 치고 남방의 남월을 쳐서 지금의 광둥·광시에 많은 군현을 설치했다. 이리하여 진(秦·Chin)의 명성은 멀리 유럽에까지 떨쳐 오늘의 차이나(China)라는 명칭이 생기게 됐다.
그러나 B.C. 213년 진시황은 승상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법가 이외의 모든 책은 불태우고 유가등 제자백가의 책을 소장한 자는 30일 이내에 모두 관에 신고해 불태우게 했다. 이에 저항한 유생을 체포해 460여명을 구덩이에 생매장하는 형을 내렸다. 이것이 역사상 악명높은 시황제의 분서갱유다. 하지만 처형규모도 크지 않고 실제론 유생이라기보다는 불로장생 약을 만든다는 사기꾼 방사(方士)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한무제는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 나라의 제7대 황제다. 안으로는 춘추전국시대 이후 싹트기 시작한 고대 전재지배체제를 완성하고, 밖으로는 건국 이래 80여년 동안 축적된 국력으로 정복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국위를 크게 떨쳤다.
한무제는 좋은 말을 얻게 하기 위해 이광(李廣)을 보내 대완(大宛)을 정복하게 했다. 이로써 중국의 특산물인 비단이 멀리 로마까지 수출돼 '실크로드(비단길)'라 불리던 동서교역로의 소통을 원활하게 했다. 또한 B.C. 108년에는 한민족 최초의 왕국 고조선을 멸망시켜 '한4군'을 설치했다.
그러나 한무제는 중국뿐만 아니라 동양을 수천년 동안이나 잠재우고만 엄청난 역사적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기원전 134년 동중서(童仲舒)는 한무제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는 육예의 과목이나 공자의 학술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모두 그 도를 끊어버려 함께 나아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한무제는 동중서의 이 건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유가사상만을 독존케 하는 문화적∙사상적 유일정책을 채택하였다.
노(魯) 나라의 유학사상은 중국 통일 봉건왕조의 기반을 공고히 다지고 안정시켜 중국사회가 봉건사회의 발전법칙에 따라 상대적으로 안정된 전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적극적 의미가 담겨있긴 하다.
그러나 한무제가 국교화한 유가사상은 원래 인간미 넘치고 동정심이 넘치는 공자의 '인(仁)' 사상을 법전화, 신비화, 교조화시켰다. 유가사상의 교조주의화, 국교화로 중국은 사회 전체가 완고한 수구의식 밑에서 창조적인 원동력을 잃고 자기 자신을 검토해서 반성하거나 자신을 조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한무제-동중서 팀'은 활발한 생명력과 합리주의적인 학술정신에 빛나던 제자백가사상에 초강력 수면제를 먹인 셈이다. 현대판 국정교과서와 블랙리스트 작성의 원조라고나 할까.
그들은 오로지 노 나라의 유학사상, 그것도 가부장적 가족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에 적합한 부문만 살리고, 그 외 모든 학술과 사상, 즉 묵가·도가·법가·음양오행가·명가·병가·농가·잡가 등을 잠들게 했다.
제자백가사상은 공리공담이 아니었다. 대부분 정치·경제·도덕·처세·과학·군사·외교 등 현실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심지어 현대의 민주정치이론, 민주사회주의·중상주의 경제이론,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컴퓨터의 이진법 원리, 실존철학 등의 불씨를 엿볼 수 있는 것도 있었다.
후세의 한 나라의 훈고학, 송 나라의 성리학, 명 나라의 양명학, 청 나라의 고증학도 따지고 보면 실은 노 나라 관방유학의 테두리 안에서의 해석을 일보도 벗어나지 못했다.
과거의 답안지 작성에서 ‘팔고문(八股文)’이라 일컫는, 일정한 서식을 정해 과거 지원자로 하여금 그대로 암송에만 열중케 하여 사상의 자유로운 표현을 고갈시키고 유학의 고정화를 가져온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지성은 그 탁월했던 창조력은 버리고 퇴행적인 노인성의 기억력에만 의존하기 시작하였다. 진시황은 유생들을 생매장했지만, 한무제는 그들의 입을 꿀로 막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분명 언론과 사상을 탄압하는 조치이지만 실은 철저하지 않았고 엉성한데가 있어 그 폐해는 20,30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학의 국교화 조치는 분서갱유보다 세련되고 온건한 점은 있었으나 그보다 훨씬 교활하고 완벽하여 그 폐해는 무려 2000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예수의 탄생을 전후로 기원전, 기원으로 나누듯, 중국의 발전사도 한무제가 유학의 국교화 조치를 내리던 기원전 134년을 전후로 중국이 깨어나 있던 시기, 잠들었던 시기로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강효백 경희대학교 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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