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에 자리한 정보통신기술(ICT) 스타트업 대표 A씨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며 이같이 하소연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으로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 대표사업인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부재로 창조경제혁신센터 존립 근거와 사업 지속 가능성이 부족해지면서 전국 17개 지역에 설치된 창조경제혁신센터 사업과 예산이 대폭 축소되고 있다. 실제로 관련 정부예산도 8%가량 줄었고, 서울시는 혁신센터 지원 예산 20억원을 백지화했다. 전남도의회도 운영 지원비 10억원을, 대전시의회는 15억원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타 지자체들도 어떻게든 구체적인 예산 감축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심지어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차기 정부 출범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질 가능성에 더해 이르면 5월 대선 전 박근혜 색깔 지우기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관측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창조경제라는 국정 어젠다와 맞물려 국내 벤처 창업생태계 조성을 위해 수년간 공들였던 마중물이 쪼그라든 셈이다.
우리가 주춤하는 사이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글로벌 선진강국들은 저성장과 높은 실업률이 지속되는 새로운 경제환경을 맞아 벤처창업 확산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영국은 '시리우스'라는 차별화 프로그램으로 예비 창업자를 대상으로 전담 전문가 제공, 투자자 발표기회, 행정지원 등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한다. 또 2020년까지 법인세를 17%까지 낮출 예정이다. 스타트업 투자로 발생한 수익에도 세제혜택을 부여한다. 글로벌 기업가 프로그램(GEP)으로 성공한 기업가와 해외에서 영국으로 이전한 스타트업을 연결해 현지 네트워크를 제공한다.
호주는 이스라엘, 미국, 중국, 독일, 싱가포르에서 '랜딩패드' 프로그램을 운영해 호주 스타트업의 해외진출을 적극 돕고 있다. 호주 스타트업이 현지 액셀러레이터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국내 스타트업에는 연구·개발(R&D) 비용을 2만 달러까지 지원한다. '시드니2030' 프로그램은 스타트업의 상품화 과정에 150만 달러를 제공한다.
프랑스는 '프렌치테크'라는 스타트업 커뮤니티를 조성, 전 세계 22개 거점을 마련해 네트워크 망을 구축했다.
지난해 프렌치테크를 정부 차원에서 추진한 후 스타트업을 통해 일자리 문제가 해결되고 전통과 혁신이 만나 시너지를 내고 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부러워만 해야 할 것인가. 창업 전문가들은 한국이 위험을 감수할 만한 인재와 시스템 부족으로 창업 선순환 생태계가 불완전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대학에서의 창업 교육이나 지원정책 등이 수요자보다는 공급자 위주라, 학생의 아이디어를 보고 지원 방안을 찾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이 원하는 사업을 이미 정해두고 이에 적합한 아이디어를 찾는 식이라 한계가 있다는 입을 모은다.
방향성 없이 유사한 지원 대책만 쏟아내는 정부도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래창조과학부와 중소기업청은 지난 1월 판교 창조경제밸리 구축, 스타트업 경진대회, 청년 창업 선도 대학 확대 등 대동소이한 내용을 잇달아 발표해 빈축을 샀다.
단기적 성과에만 집착하는 관행도 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 벤처기업 대표는 "실리콘밸리에서 벤처캐피털(VC)과 벤처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투자 문화가 정착하는 데 5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며 "VC가 본격화된 지 10여년에 불과한 한국에서는 아직 투자에 대해 단기적인 성과를 바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씨앗을 뿌리는 단계의 스타트업 벤처 확산정책과 지원 기업의 수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이후 단계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벤처기업 군들이 단계별로 크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정책의 질적 전환과 더불어 사회적 인식 확산이 필요하다.
지난해 말 한국을 방문한 클라우스 슈밥 다보스포럼 회장은 "기존 대기업들이 덩치 큰 물고기에서 작고 기민한 물고기로 거듭나야 한다"며 "덩치가 크고 움직임이 느린 기업이 작고 빠른 상대에게 이길 수 없는 것이 4차 산업혁명의 특징이기 때문에 창의적인 창업가들이 더 많아지도록 해야 한다"며 스타트업에 대한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기업보다는 시장의 움직임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민첩한 구조의 스타트업이 글로벌 생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시대가 눈앞에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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