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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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4-0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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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일본 노래 부르는 것을 극히 싫어했던 애국경찰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무관은 빨치산 토벌대장 직책을 수행하면서 세 가지만은 철칙으로 삼고 몹시 싫어했다.

 첫 번째가 회식할 때 일본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작전 중 적의 목을 베라는 상급기관의 지시였다. 그리고 세 번째가 작전에 지장을 준다고 사찰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차일혁은 일본 노래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정도로 민감했다. 항일독립군 출신인 차일혁은 6·25전쟁 때 일본군 출신의 상급자가 일본 노래를 부르면 술상을 뒤엎고, 술자리를 중단시키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차일혁의 평생 지기(知己)였던 전북일보 김만석(金萬錫) 기자도 차일혁의 일본 노래와 관련한 일화를 그의 비망록에 남겨둔바 있다. 그의 비망록에 의하면, “차일혁은 김의택(金義澤) 도경국장이 마련한 회식(會食) 자리에서 일본 노래를 부르는 것에 화가 나서 술상을 발로 걷어차 버리고 나올 정도로 일본노래 부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증언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1951년 3월 8일, 차일혁은 전북도경 보안과장으로부터 도(道) 경비사령부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경비사령부에 도착해보니 부관이 막아서며 손님이 있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차일혁은 호출을 받고 왔다며 그냥 들어서려 하는데 부관이 막아섰다. 차일혁은 전투하는 대대장을 무작정 기다리게 하는 관료적 소행이 괘씸해서 부관의 뺨을 후려갈기고, 돌아와 버렸다. 후에 뚱뚱한 체격에 성격이 유한 도경 보안과장이 “차 대장은 성질이 왜 그리 급하냐?”며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냈다. 차일혁도 “전투하는 사람에겐 한 시간이 중요하다.”며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도경 보안과장은 “하긴 도 경비사령관님이 참석한 회식자리에서도 상을 발로 걷어차고 나가버린 사람이니…!”라며 불쾌해했다.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은 “간부들이 일본 노래를 함께 부르는 것이 비위가 상해서 그랬습니다.”라며 응대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자네 그 성질을 고치지 못하면 큰 화를 당할 걸세.”라며 도경 보안과장은 화가 풀리지 않는 듯 휑하니 나가 버렸다. 차일혁은 일본 노래를 부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현제명이 작곡한 경찰가(警察歌)의 경우 왜색적이라 좋아하지 않았다. 이 경찰가는 지금까지도 그대로 부르고 있다. 차일혁의 이런 성향을 잘 아는 사람들은 회식자리에서 절대 일본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이후 차일혁이 있는 곳에서는 그 누구도 일본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不文律)처럼 됐다.

 그렇다면 차일혁은 회식이나 모임에서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차일혁은 부대원들과 회식을 할 때는 독립군 시절 불렀던 노래들을 즐겨 불렀다. 1951년 4월, 빨치산들이 준동할 여름철 녹음기(綠陰期)를 앞두고 차일혁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는 전북도민들의 불안감을 씻어주고 전투경찰들의 늘름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사열식과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김의택 도경국장을 비롯하여 지역 국회의원과 기관장 및 유지들이 모두 참석했다. 차일혁은 개회사를 통해 부하들에게 “최후 한 방울의 피까지도 국가에 충성하고자 입대한 대원들이 우리들의 숙원인 공비토벌에 신명을 바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모두 영광스럽게 생각하자.”는 짤막하면서도 강한 메시지가 담긴 훈시를 했다. 대원들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각종 전투시범을 통해 힘껏 발산했고, 이에 김의택 도경국장은 격려사로 화답했다. 행사는 사열식을 끝으로 순조롭게 잘 끝났다. 차일혁은 대원들의 단결심을 고양하고 사기진작을 위해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체육대회는 각 중대별로 박진감있게 진행됐고, 대원들은 누구나 할 것이 전장의 시름도 잠시 잊은 채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체육대회가 끝난 후 차일혁은 그동안 부하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회식자리를 마련했다. 회식자리에서 대원들은 차일혁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때 차일혁은 어린 시절부터 즐겨 불렀던 노래, “해는 이미 서산에 빛을 숨기고 어둠 빛은 사방에서 드려 몰려오도다. 만경창파에 성난 파도 뱃머리를 진동해 두둥실 떠가는 작은 배. 나의 갈길 만경탑.”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고향이 그립고 조국이 그리울 때마다’ 흥얼대며 불렀던 추억이 물씬 담긴 노래였다.

 차일혁은 회식자리에서 민족의 애환이 담긴 서정적(抒情的)인 노래와 시는 물론이거니와 우리나라 전통가락인 판소리와 우리 선조들이 자연을 벗 삼아 풍류(風流)를 즐길 때 읊조렸던 시조 등 우리나라 전통의 소리와 가락을 찾아 즐겨 불렀다. 1951년 변산작전에서 많은 부하들을 희생하고 돌아오자, 전북도경 보안과장이 차일혁 부대를 방문했다. 작전초기 자신의 잘못으로 차일혁의 부대원들이 많은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사과 겸 위로 차 찾아왔다. 차일혁도 그로인해 보안과장을 너무 심하게 타박했던 탓으로 그의 손을 잡으며 사과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풀렸고, 급기야는 김의택 도경국장을 비롯한 도경간부들이 모여 회식을 하게 됐다. 회식자리에서 차일혁은 작은 북을 치고 장단을 맞추며 흥을 돋우었다. 그것을 보고 보안과장은 “차 대장을 평소 야생마로만 생각했는데 오늘부터는 생각을 바꿔야겠소.”하며 웃었다. 차일혁은 우리 국악에 대해서도 상당한 실력과 소양을 갖춘 문화인이었다. 물론 그동안 회식 때마다 단골메뉴처럼 불리어지던 일본 노래는 쑥 들어갔다. 차일혁이 경찰들의 회식문화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지리산을 근거지로 하여 후방지역을 어지럽히던 빨치산 총수 이현상(李鉉相)을 사살한 후 차일혁의 일상생활에도 오랜만에 ‘마음속의 평화의 봄’이 찾아왔다. 그동안 5년간 수행해 왔던 빨치산토벌대장이라는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나 일선 경찰서장으로 발령받은 차일혁은 우리 문화와 예술에 심취하게 됐다. 그런 태도는 회식자리에서도 자연스레 나타났다. 1956년 2월, 충주경찰서장 시절 차일혁은 관사에 지역유지들을 초청하여 회식자리를 마련했다. 충주경찰서장에 보임된 지 1년 5개월째였다.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해서 마련한 석별의 정을 나눈 자리였다. 충주지청검사, 충주교육감, 충주읍장 등 충주시내 기관장들이 대부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차일혁은 이색(李穡)의 시를 낭독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물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차일혁은 그동안 일본 노래로 뒤덮였던 일본풍 회식문화를 우리전통이 깃든 품위와 격조(格調) 있는 문화마당으로 바꾸었다. 이른바 ‘문화와 예술이 어우러진 회식’이었다.

 차일혁의 격조있는 이런 ‘문화회식’은 계속됐다. 1956년 2월 9일, 충주경찰서장 관사에서 차일혁은 충주 흥업은행지점장 등 금융계 인사와 충주지검 검사, 충주 제중병원장, 충주중학교장, 충주의용소방대장을 초청해 회식을 했다. 이 자리에서 차일혁 총경은 조선시대 김창업이 지은 ‘거문고에 술을 꽂아 놓고’라는 시조를 장단에 맞춰 구성 짓게 읊었다. “거문고에 술을 꽂아 놓고 호젓이 낮잠 들예. 시문견폐성(柴門犬吠聲)에 반가운 벗 오도가야. 아히야 점심도 하려니와 외상 탁주 내어라.” 내용을 풀어보면 이렇다. “거문고에 술대를 꽂아놓고 호젓하게 낮잠을 자는데, 사립문 밖에 개 짖는 소리가 나서 일어나 보니, 반가운 친구가 오는 구나. 얘야 술파는 아이야, 점심은 하지만 우선 외상 막걸리부터 사오너라.”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자기를 찾아오는 친구에 대해 외상술이라도 사려는 인간미가 엿보인다. 이는 차일혁의 마음을 대신 담은 시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차일혁의 이런 문화회식은 공주경찰서장 시절에도 계속 이어졌다. 1957년 4월 20일 토요일 오후, 많은 사람들이 공주경찰서장 관사로 몰려들었다. 이날의 회식에서는, 공주지방의 검찰과 경찰관계자 뿐만 아니라 지역 내 의료, 교육, 언론계 인사들을 포함하여 시골읍장과 말단 경찰관까지 초청된 자리였다. 차일혁의 초청으로 공주지방의 각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차일혁이 아니면 마련할 수 없는 자리였다. 당시엔 ‘요정문화’가 성행하던 시기였다. 고위공직자나 정치가들은 의례적으로 회식이나 술자리 모임은 고급 요정이나 술집에서 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차일혁은 달랐다. 차일혁은 그런 저급한 시류(時流)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고집했다. 그래서 회식장소는 늘 비용이 들지 않는 널따란 경찰서장 관사를 이용했다. 공주의 기관장들도 그런 차일혁을 신뢰하며 맘속으로 존경했다. 차일혁에게는 청렴한 경찰서장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꾸밈없는 솔직 담백한 성격이나 마음씀씀이가 지역 기관장 및 주민들의 마음을 끌어 당겼기 때문이다.

 차일혁은 그렇게 모인 자리를 우리 전통의 문화마당으로 만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술이 한 순배 두 순배 돌아가면 차일혁을 비롯한 일행들은 우리 문화와 예술을 서서히 탐(耽)하기 시작했다. 봄밤의 흥취에 흠뻑 젖은 사람들은 한사람씩 흥에 겨워 노래를 불렀다. 손님들은 차일혁이 일본 노래를 매우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본노래를 부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대신 주로 우리 전통의 창과 민요를 불렀다. 참석자들은 우리 가락과 장단에 잔뜩 취했다. 차일혁이 마련한 회식 자리는 늘 우리 소리와 가락으로 채워졌다.

 차일혁은 일본문화를 싫어했던 것만큼 우리 노래와 가락을 좋아하며 즐겼다. 나아가 시를 낭송하고 시조를 읊조리는 풍류도 즐길 줄 알았다. 비록 회식자리에서 일본노래를 부르다 차일혁에게 얻어맞은 일본군 출신의 경찰간부가 앙심을 품고서 차일혁을 ‘사상범’이라고 누명을 씌우기도 했지만, 차일혁은 그런 것에 뜻을 굽히거나 연연하지 않았다. 차일혁은 오히려 초연했다. 그리고 일본문화 배척에 더욱 힘썼다. 차일혁의 그런 노력으로 경찰조직 내에서 그리고 차일혁이 경찰서장으로 있는 지역에서는 일본 노래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차일혁은 우리 문화와 예술을 아끼고 보호하며, 우리의 전통 가락과 소리를 즐기며 보급에 힘썼던 진정한 ‘문화경찰이자 애국경찰’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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