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민족자본으로 세운 인천공립보통학교…인천 3.1독립만세운동 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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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4-05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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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박흥서 기자 =인천공립보통학교는 창영초등학교의 옛날 이름이다.

이 학교는 일본인 교사 1명과 한국인 부교사 1명을 교원으로 임명하고, 1907년 5월 6일 개교했다.

창영초등학교축성식(1907)[사진=인천시]


원래는 인천객주조합에서 설립한 용동의 제녕학교를 인수해 개교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아 인천일어학교 교실 1칸을 빌려 3명의 학생을 모집해 개교했다. 교장은 인천부윤이 겸했다.

그 해 6월 제녕학교 학생 74명을 받아들이고, 계속 학생이 늘어나자 12월 20일에 우각현(현 창영동)에 목조 건물 1동을 세워 이전했다.

1910년 3월 26일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여 졸업생 18명을 배출했다.

이 학교는 4년제 과정이었으나, 나이 많고 학력이 높은 학생이 2학년으로 입학하여 특별히 3개년 수업과정을 마친 것이다.

1913년 12월 1일에 인명학교까지 인수하며 건물을 뜯어다가 기존 건물에 이어 붙여 교사를 확장했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학교 부설 통폐합, 학교 이름 변경 등의 변화를 거듭하다가 1936년 10월 1일에 인천창영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이 바뀌며 지금의 창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창영초등학교 구교사[사진=인천시]


1946년 7월 1일 남자 143명, 여자 123명 총 266명의 졸업생을 광복 후 첫(통산 36회) 배출하며 초등교육을 담당했으나, 6·25전쟁으로 1950년 6월 27일 임시 휴교했다가 수복이 되면서 경기도경찰국이 사용하던 교사를 다시 찾아 학교를 열게 되었다.

1953년에는 학생 수가 총 3천 52명에 달했다.

순수 민족 자본으로 세워진 인천공립보통학교 주변에는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와 고서점 거리가 자리하여 이 일대는 인천지역 교육의 중심지로 손색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인천 3·1 독립만세운동의 진원지로 알려져 있다. 현재 창영초등학교 내에는 1995년 3월 6일에 총동창회에서 세운 ‘인천지역 발상지’기념비가 있다. 구 교사는 인천시 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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