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현 군부는 집권 이후 정국 혼란 방지를 잠재우고 국가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국민의 정치활동은 물론 기본권까지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이달에는 군부의 정치 개입을 허용하는 새 헌법이 반포되면서 태국 민주주의는 뒷걸음질만 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 군부가 지난 2015년 예고했던 태국 총선은 벌써 2년 이상 지연되고 있다. 작년 개헌안 국민투표 통과로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태국의 민정 이양 절차는 무려 70년의 재위 기간 정치적인 부침과 잦은 쿠데타 가운데서도 국민들의 절대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모든 국민의 아버지'로 불렸던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이 지난해 10월 서거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지난해 12월 푸미폰 전 국왕의 유일한 아들인 마하 와치랄롱꼰 왕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그가 아버지처럼 위기 상황에서 '나라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지는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군부가 푸미폰 전 국왕에 비해 국민의 지지도가 낮은 그를 앞세워 장악력을 키우려 한다는 관측도 나온다.
지난 6일 와치랄롱꼰 새 국왕의 서명 후 반포된 새로운 헌법에는 총선 이후 5년간의 민정 이양기에 활동할 상원의원을 군부가 직접 지명하고, 군부가 지명한 상원의원을 총리 선출 과정에 참여시킨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한 국가 위기 시에는 군 사령관, 경찰청장 등이 포함된 위기관리위원회가 행정과 입법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쁘라윳 총리는 새 헌법 선포식이 끝난 후 기자들에게 "개헌 후속조치 이행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정확한 총선일정을 특정할 수 없다"며 "개헌 이후 총선까지는 18개월가량 소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총선은 대략 내년 11월께나 치러지고, 민정 이양도 2019년 초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때까지는 최고 군정 기구인 국가평화질서회의(NCPO)가 유지되고, 군부가 주도하는 내각도 고스란히 유지될 전망이다. 또한 현 정권은 총선 때까지 시민과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에 대한 제한 조치를 쉽게 해제하지 않을 것으로 보여 총선이 제대로 치러질지도 의문이다.
군부는 2년여의 준비 끝에 지난해 8월 새 헌법 초안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태국 국민은 60%의 찬성표로 군부에 힘을 실어주었다. 당장 민주주의를 되찾는 것보다는 2006년 탁신 친나왓 총리가 축출된 이후 10여년간 계속된 혼란이 하루속히 수습되는 것이 우선이라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새로 즉위한 와치랄롱꼰 국왕의 제안으로 국왕의 일시적인 부재 시 섭정자를 지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등의 규정을 추가하는 손질이 이뤄지면서 새 헌법 확정이 늦춰졌다.
태국은 1932년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후에도 현재까지 왕실과 군부는 국가통합 및 국가수호의 광범위한 상징으로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푸미폰 전 국왕은 여느 입헌군주제 국왕과는 달리 상징적 존재로 남지 않고 군부 쿠데타 등으로 정국이 불안할 때마다 높은 도덕적 권위로 시국 안정을 위해 영향력을 유감없이 행사했다. 그는 1992년 방콕 민주화 사태 시에는 민주 세력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2006년 쿠데타도 묵시적으로 동의함으로써 탁신 전 총리의 축출을 이끌어냈다. 지난 2014년 쿠데타도 최종적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으면서 탁신의 동생 잉락 친나왓 총리의 퇴진과 군부 통치로 귀결될 수 있었다.
태국 군부는 농민과 빈민 소외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 진영의 정치적인 재기를 철저히 봉쇄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현재 해외 도피 중인 탁신 총리 일가의 10년 전 주식거래에 대해 뒤늦게 수천억원의 미납세금 추징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탁신 일가는 부패 세력이라는 여론을 불러일으켜 그들의 컴백을 견제하겠다는 속셈이다.
태국 군부정권은 새로 즉위한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에 대한 언론의 비판도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왕실에 대한 비판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는 '왕실모독제'를 남용해 언론과 탁신 전 총리 진영의 반대운동을 원천 봉쇄하고 있다.
와치랄롱꼰 새 국왕이 해외 망명 중인 탁신 전 총리와 친밀한 관계를 가져왔다는 주장도 있지만 현재의 태국 상황은 쁘라윳 총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는 70년 만에 새로 들어선 왕권과 그 제도를 수호하는 군사 독재자로 부상해 장기집권이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태국의 근대 역사는 왕실과 군부 그리고 도시의 중산층이 포함된 기득권층과 경제 성장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농민과 소외계층의 대립으로 얼룩졌다. 태국 군부 정권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계층 간의 갈등 해소를 위해 총력을 다해야 정치적인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 지난 1월 군부는 국민 화합을 위한 합의를 도출하자며 야당 인사들을 포함한 정치인들과 청문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이 제안은 새 국왕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그러나 탁신 전 총리 세력에 대한 '목조르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제안은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평가된다. 태국 민주주의 미래가 암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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