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혁은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은 채 오로지 성공적인 토벌작전과 부하들의 희생이 없기만을 바랐던 빨치산 토벌대장이었다. 차일혁의 마음 어느 한 곳에도 부하들을 통한 명리(名利)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에게 소원이 있다면 빨리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부하사랑들의 희생이 없기만을 갈구(渴求)했다.
그러다보니 부하 사랑이 깊었고, 남달랐다. 비록 상관이라도 굽히지 않았던 차일혁도 부하를 위해서라면 서슴치 않고 몸을 낮추었다. 칠보발전소 탈환작전을 끝내고 한참이 지난 후 정읍작전을 준비하던 때, 제18전투경찰대대의 핵심전력인 특공중대 대원 8명이 외출을 나가 술을 마시고 소란을 피우다가, 이를 말리러 온 인근 파출소 소장과 순경들을 구타함으로써 전주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됐다. 보고를 받은 차일혁은 어찌할까 망설이다가 부하들의 잘못이 명백한 지라 그대로 내버려 뒀다. 그들도 자숙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여겼다. 또 그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던 차 국군8사단과 합동작전을 하게 됐다. 차일혁은 출동 하루를 앞두고 유치장에 갇힌 부하들이 충분히 반성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전북도경 백한종 총경과 함께 전주경찰서로 박병배 경찰서장를 찾아갔다. 누구보다 남들에게 굽히기 싫어하던 차일혁이 순전히 부하들을 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백한종 경무과장은 차일혁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아끼는 선배로서 차일혁의 애로사항 해결을 위해 기꺼이 나섰다. 박병배 전주경찰서장과는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지만 직접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박 서장은 차일혁보다 나이가 세 살 위로 성격이 원만하고 유머가 풍부한 사람으로 차일혁이 존경하는 경찰 선배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박 서장은 차일혁이 무엇 때문에 왔는지 잘 알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짓궂게 차일혁 부대의 전투 활동과 혁혁한 전과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다. 차일혁도 아무리 부하들을 사랑한다고 해도 초면에 “부하들 때문에 왔노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저 공손한 태도로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있었던 애로사항들만 늘어놓았다. 차일혁의 눈치를 살피며 대화를 끌고 나가던 백한종 경무과장이 드디어 나섰다. “제18전투경찰대대가 작전 때문에 곧 출동하게 됐으니, 유치장에 갇힌 차일혁 부대의 특공대원들을 석방해 달라.”며 박 서장에게 부탁조로 말했다.
그런 후, 박병배 전주경찰서장은 즉시 경비주임을 시켜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던 8명의 특공대원들을 데려오게 했다. 경찰서장 실로 들어온 8명의 대원들은 차일혁을 보고 일제히 경례를 한 뒤 부동자세를 취했다. 박 서장은 그런 모습을 보고 씩 웃더니 대원들을 향해 “차 대장이 너희들을 데리고 가고 싶다는데 내일 출전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차 대장을 따라가기 싫으면 여기 그냥 남아도 된다. 너희들 마음대로 선택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차일혁의 대원 중 유난히 체격이 큰 엄윤섭 대원이 불쑥 나서며, “우리들은 계속 유치장에 가둬두면 탈출하려고 했습니다. 저희가 왜 여기에 남아 있습니까?”라며 당차게 대답했다. 차일혁의 부하다운 패기가 넘친 대답이었다. 그렇게 해서 차일혁은 유치장에 갇힌 부하들을 데리고 부대로 복귀하여 출동하게 됐다. 그런 지휘관과 부하들이 토벌작전에 나섰으니 작전은 성공이었다.
제18전투경찰대대와 차일혁의 전공(戰功)과 무훈(武勳)에 대한 박병배 경찰서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차일혁 부대는 창설 이래 짧은 기간 동안 그 어떤 부대도 감히 넘보지 못할 막대한 전공을 세웠다. 1950년 12월 처녀출전인 구이면 작전 이후 차일혁 부대는 뛰어난 전공으로 내무부장관, 치안국장, 전북도지사, 전북도경국장, 전북지구전투사령관, 전북 민사부장, 작전지역 기관장 및 유지들로부터 수 십 차례의 표창과 감사장 그리고 위문품을 받았다. 차일혁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는 일천(一淺)한 부대창설에도 불구하고 전북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전투를 가장 잘하는 경찰부대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실제로 제18전투경찰대대의 전공(戰功)을 뛰어넘을 부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 차일혁 부대에 언론에서는 “18대(隊)의 빛나는 무훈(武勳)” 또는 “치안에 공훈(功勳) 찬란(燦爛)”이라는 제하로 대서특필(大書特筆)하며 연일 보도했고, 차일혁 부대의 혁혁한 전공으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전라북도 경찰도 덩달아 “전공(戰功) 찬란한 전북경찰”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됐다. 이 모두가 차일혁이 지휘한 제18전투경찰대대의 활약이 만들어낸 ‘피와 땀의 결과’였다. 김의택 도경국장은 차일혁 부대의 승승장구에 싱글벙글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차일혁 부대를 방문하여 치하했다. 일약 차일혁 부대는 전북의 명예를 선양하는 자랑거리가 됐다.
차일혁은 부대의 명예를 높이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전북도경의 위상을 크게 높였음에도, 겸손(謙遜)과 겸양(謙讓)의 모습을 보여 뭇사람으로부터 또 다시 존경을 받게 됐다. 차일혁은 그런 뛰어난 전공을 세우고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만 직책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문을 열고나서 “나는 조국의 존망지국(存亡之國)에 처한 대한(大韓)의 아들로서, 또 대한(大韓) 경찰관의 일원으로서 다만 직책을 완수하려고 애쓸 따름인데, 분에 넘치는 표창과 감사장을 받으니 미안스럽습니다. 국가의 위기에 처한 국민의 일원으로서 아직도 마음껏 일하지 못한 것을 대단히 미안스럽게 생각하며 동포에게 사과드립니다. 더구나 부하들을 많이 희생시킨 책임자로서 유가족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고 말했다. 차일혁 다운 말이다. 이는 당시 《전북일보》에 실린 차일혁 및 제18전투경찰대대를 다룬 기사내용이다.
차일혁의 상관들은 지휘관으로서 차일혁의 배짱과 당당함 그리고 기개를 높이 평가했다. 1950년 8월 14일, 가마골 작전을 앞두고 전남북 합동작전을 지휘감독하기 위해 치안국 보안과장으로 있던 최치환(崔致煥) 경무관이 내려와 차일혁이 지휘하는 연대급 규모의 ‘철주부대(鐵舟部隊)’를 점검했다. 그런데 그 전날 밤, 차일혁은 최치환 경무관이 머문 술집에서 회식을 하게 됐다. 오랜만의 회식이라 차일혁은 부하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 떠들썩하게 놀았다. 그때 최치환 경무관의 부관이 주인을 통해 차일혁을 불러, “조용히 해 달라.”고 했다. 차일혁은 “조용히 해 달라!”는 부관의 그런 태도가 마치 부하들이 있는 앞에서 자신이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다소 심한 말을 부관에게 하게 됐다.
이로 인해 서로 언쟁(言爭)이 벌어지게 됐고, 그 과정에서 차일혁의 부하들인 대대장들이 뜯어 말리는 과정에서 다소 시끄럽게 됐다. 그럼에도 최 경무관은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별다른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부대 점검을 위해 나온 최 경무관을 뵙게 됐다. 분위기가 어색했지만, 차일혁은 예의를 갖춰 최치환 경무관에게 어제 저녁 자신이 왜 그랬는지에 대해 사과를 겸하여 솔직하게 밝혔다. 차일혁은 “비록 말단의 부대장일망정 제 명령에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하는 부하들 앞에서, 만약 제가 상관이라 하여 벌벌 떨거나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다면 부하들이 어떻게 저를 믿고 따르겠습니까.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최치환 경무관도 차일혁의 말에 화통하게 응대했다. “치안국장 대리로 온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는 그 호기라면 이번 가마골작전은 성공하리라 믿소.”라며 짧게 말했다. 그리고 치안국장을 대신하여 지휘봉을 전달했다. 작전은 최치환 경무관이 예견했던 대로 대 성공이었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불미스런 일에도 불구하고 최치환 경무관은 차일혁 부대를 선봉으로 내세워 가마골 작전을 수행케 했다. 차일혁도 사소한 감정보다는 능력위주로 인재를 등용하는 최치환 경무관의 지휘력에 존경을 표했다. 당시 가마골작전 시 최치환은 치안국 직속의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를 가마골작전에 투입하여 운용할 수도 있었으나, 차일혁의 지휘관으로서의 능력과 기개를 높이 평가하고, 전북도경 소속의 차일혁 부대를 과감히 투입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게 했다.
차일혁이 조금이라도 명리를 탐했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일혁은 한결같이 자신의 영달(榮達)을 위한 명리보다는 부하를 위해 노력하고 그들을 누구 못지않게 소중히 여기며 소신껏 행동했다. 그렇지만 부하들을 위해서는 목숨보다 귀하게 여긴 소신도 굽힐 줄 아는 융통성 있는 전투지휘관으로서의 따뜻한 모습도 보여줬다. 차일혁이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상관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것도 모두 그런 까닭일 것이다. 〈끝〉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