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옥철 특파원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시내 할리우드 블러바드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프랭클린 애비뉴로 일진광풍이 몰아치던 시절이다. 플로렌스와 노르망디 애비뉴에선 도로 곳곳에 화염이 불타올랐다.
재미 한인 이주사의 최대 비극으로 기록된 4·29 LA 폭동이 일어나던 1992년 4월 29일 오후의 LA 도심 상황이다.
미 일간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는 28일(현지시간) 만일 25년 전 그 폭동이 오늘 일어났다면 상황이 어땠을지 가정했다.
소셜미디어(SNS)와 시민 저널리즘으로 무장한 주민들이 저마다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현장 상황을 중계했을 터다. 페이스북·유튜브에는 현장 영상 클립이 넘쳐나고 건물 옥상에서 카메라를 돌리는 CNN 중계진이 오히려 왜소해보일 정도다.
하지만, 실제 LA 폭동 당시에는 어땠을까.
많은 전문가가 언론의 역할과 책임론에 주목한다.
한인 기독교커뮤니티 개발협회 임혜빈 회장은 "LA 폭동을 재난으로 키운 것은 정부의 무책임, 경찰의 무관심이 주된 원인이었지만, 한흑(韓黑) 갈등에 불을 지핀 언론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에도 뉴스전문채널 CNN이 있었지만, 케이블을 달아야만 시청할 수 있는 일종의 사치품이었다고 한다. 디지털 뉴스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SNS도 없던 시절이다.
그 무렵 언론보도의 주력은 지역방송이었다.
KTLA의 영어와 스페인어 라디오 방송이 아파트 사이로 퍼져나갔다. 스탠 챔버스, 할 아이스너 등 앵커들이 혼돈의 상황을 현장에서 목소리로 전했다.
또 하나는 헬기였다.
'차퍼 밥(Chopper Bob)'으로 불린 유명 조종사 겸 리포터 조이 터르가 모는 보도용 헬기가 폭동이 극심했던 플로렌스와 노르망디 애비뉴 상공을 맴돌았다.
헬리콥터 보도에서는 "경찰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터르는 "LA는 미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로컬 뉴스팀을 갖고 있었다. 시카고나 뉴욕과 달리 LA 뉴스팀은 지진, 홍수, 화재, 고속도로 추격전을 보도한 경험이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인 연구자 사이에서는 헬기를 이용한 당시 보도가 폭동을 부추기는 역효과를 가져왔다는 지적도 나온다.
4·29 LA 폭동을 현장에서 경험한 장태한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학(UC리버사이드) 교수는 "당시의 주류 방송이 헬기로 생방송을 내보냈는데, 마치 밖으로 뛰쳐 나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돼 버린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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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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