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수십억원 지원하면서 선수들 물통 채우는 허드렛일까지
(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정몽원(62)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한라그룹 회장)이 누군지 궁금하다면 한국 아이스하키 대표팀 벤치 옆을 주시하면 된다.
대표팀이 골을 넣는 순간 투명 펜스가 부서져라 두들기고, 불리한 판정이 나왔을 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
그 사람이 안경을 썼다면 십중팔구다. 한국 아이스하키의 '헌신적인 후원자' 정 회장이다.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가 지난 29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막을 내린 세계선수권 디비전 1 그룹 A(2부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사상 첫 월드챔피언십(1부리그) 진출의 쾌거를 이뤄냈다.
이제 한국은 내년 5월 덴마크에서 열리는 월드챔피언십에서 캐나다, 러시아, 핀란드, 미국, 스웨덴, 체코, 스위스 등 세계 최고 레벨의 강팀을 상대로 꿈에 그리던 대결을 펼친다.
고교팀 6개, 대학팀 5개, 실업팀 3개, 등록 선수가 233명밖에 없는 척박한 한국 아이스하키에서 일궈낸 믿어지지 않는 기적이다.
'암흑시대'인 중세에서 벗어난 르네상스가 메디치 가문의 300여 년간의 지속적인 후원 덕분이었던 것처럼 '키예프의 기적'을 이야기하려면 정 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재계에서 소문난 아이스하키 마니아인 정 회장은 1994년 현재의 안양 한라 아이스하키단을 창단했다.
1998년 부도를 맞는 등 숱한 경영 위기를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아이스하키단을 지켜냈다.
한라 아이스하키단의 한해 운영비는 45~50억원에 달한다. 10억원 정도만 더 보태면 웬만한 프로농구팀을 운영할 수 있는 금액이다.
아이스하키는 다른 프로 스포츠와 달리 비인기 종목이라 광고나 후원을 기대할 수 없다.
매년 수십억원의 적자를 보면서도 한라 아이스하키단을 운영한 정 회장의 열정은 헌신적이라고밖에는 다른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정 회장의 주도 속에 그룹 차원의 탄탄한 지원과 애정을 받고 자란 한라 아이스하키단은 최근 끝난 2016-2017 아시아리그에서 사상 첫 통합 2연패를 달성했다.
대표팀 22명 엔트리에서 한라 출신이 3분의 2 이상인 상황에서 한라 아이스하키단의 성장과 맞물려 한국 아이스하키도 진화를 거듭했다.
정 회장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자 2013년부터 협회장을 맡아 강력한 '평창 드라이브'를 걸었다.
2014년 7월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스타 선수 출신인 백지선(영어명 짐 팩) 감독을 영입했다. 뒤이어 또 한 명의 NHL 스타 플레이어 출신인 박용수(영어명 리처드 박) 코치까지 가세했다.
백 감독과 박 코치 부임 이후 선진 아이스하키 시스템을 도입하고, 귀화 외국인 선수가 가세하면서 한국 아이스하키는 빠르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2014년 경기도 고양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디비전 1 그룹 A에서 5전 전패를 당했던 한국은 불과 3년 만에 3승 1연장승 1패의 성적으로 1부 리그 입성의 쾌거를 이뤄냈다.
정 회장은 지난 30일 인천국제공항 입국 인터뷰에서 "난 판을 깔아줬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25년 이상 아이스하키에 투자한 그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다른 비인기 종목에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는 사례가 있지만 정 회장에게는 명예욕이나 야심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그저 아이스하키가 좋아서 이 일을 할 뿐이다.
정 회장이 협회장으로 취임하기 전,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 개막을 불과 사흘 앞두고 결전지에 입성하곤 했다.
시차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경기를 치르니 성적이 날래야 날 수가 없었다. 협회가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얘기를 들은 정 회장은 대표팀이 일주일 이상 먼저 도착해 현지 적응을 할 수 있도록 호텔 비용을 몰래 대주곤 했다. 돈을 써도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헝가리에서 열린 유로 아이스하키 챌린지 대회에서는 '물통 사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곳까지 건너가 대표팀을 격려한 정 회장은 피리어드와 피리어드 사이 휴식시간 때 선수들이 사용하는 물통이 비워진 것을 발견했다.
모른 척하거나 누구를 시켜도 될 일이었지만 정 회장은 직접 물을 따라 물통을 채웠다.
보통 협회장 정도의 지위라면 관중석 가운데 상단의 귀빈석에서 경기를 관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정 회장은 선수들 바로 옆 부스를 더 선호한다.
출전하는 선수들 한 명 한 명과 주먹을 맞부딪히며 기운을 불어넣는 의식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다.
정 회장은 대표팀의 1부리그 입성이 확정되는 순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백 감독과 격하게 포옹했다. 그의 눈물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우공이산,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이 큰 성과를 거둔다는 고사성어다. 정 회장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산을 옮겼다.
정 회장은 "난 그저 판을 깔아준 것이고, 내 구상을 실질적으로 실천한 것은 코치진과 선수들"이라며 "평창 동계올림픽은 물론 대표팀이 앞으로도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계속 돕겠다"고 말했다.
changyong@yna.co.kr
(끝)
[연합뉴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