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대선] '데가지즘' 열풍…구체제·기득권 청산, 개혁요구 '봇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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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5-08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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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체제·인물 다 바꾸자" 기성 정치엘리트에 대한 분노…공룡정당들 몰락
마크롱 승리했지만, 포퓰리즘 득세 이어질 듯…정치개혁·국민통합 난제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프랑스 대선이 중도신당 앙마르슈(En Marche·전진)의 에마뉘엘 마크롱(39)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현 정부 경제장관직을 내려놓고 뛰쳐나온 마크롱이 1년 전 신당을 창당하고 그해 겨울 대권 도전을 선언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권자들은 기성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에 분노를 쏟아내며 정계의 두 '이단아'인 마크롱과 르펜을 결선에 진출시켰다.

이변이 속출하며 프랑스 정치사를 새로 쓴 이번 대선에서는 오랜 경기침체와 잇따른 테러 위협, 유럽연합(EU)과 세계화에 대한 반감 속에 불어닥친 좌·우 포퓰리즘이 무한경쟁에서 소외된 노동자·서민층을 파고들었다.

◇구체제 청산 '데가지즘' 열풍…佛 정치구도 격변 예고

이번 프랑스 대선은 '데가지즘'(Degagisme)이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체제나 인물의 청산을 뜻하는 데가지즘은 1차 투표 종반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급진좌파 후보 장뤼크 멜랑숑이 사용하기 시작한 뒤 이번 선거를 가장 잘 표현한 단어로 언론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도배'했다.

1년 전만 해도 이번 대선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수아 올랑드 등 전·현직 대통령과 마뉘엘 발스와 알랭 쥐페 전 총리 등이 경합하는 2012년 대선의 재판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는 완전히 빗나갔다.

지난 30여 년간 이어진 저성장과 높은 실업률, 국제무대에서의 프랑스의 위상 약화로 '다 갈아엎자'는 데가지즘 열풍이 몰아쳤다. 선거 혁명에 가까운 이변이 속출한 끝에 기성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유력 정치인들이 모두 탈락하고, 정계 '이단아'들이 전면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결선에 마크롱과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이 오른 것은 프랑스 정치사의 새로운 페이지가 쓰인 '대사건'이었다.

둘 다 전후 프랑스 정치를 양분해온 중도좌파(사회당)와 중도우파(공화당) 출신이 아닌 신생 또는 주변부 정당 후보들이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5공화국 헌법에서 대선 결선투표를 도입한 1958년 이후 기존 양대 정당 출신이 아닌 후보들끼리 결선에서 맞붙게 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기성 정치권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의 정치혁신에 대한 열망과 세계적으로 몰아닥친 포퓰리즘의 득세라는 환경 속에 두 사람은 유력후보들을 제치고 결선에 오르는 '파란'을 연출했다.

반면에, 기존 공룡 정당인 사회당과 공화당은 유권자들의 기성 정계에 대한 불신 속에 5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결선 진출자를 내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양당이 내달 총선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상실하면 존립 근거가 위협받을 수 있다.

'이단아'들이 일으킨 돌풍의 원동력은 기성 주류 정치권과 기득권 계층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과 분노였다.

지난해 12월 나온 프랑스의 세대별 연구보고서 'Generation Quoi'에 따르면, 청년층의 87%가 정치를 불신한다고 답했고, 99%가 기성 정치권이 부패했다고 응답하는 등 프랑스 유권자, 특히 청년층의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극히 심각한 수준으로 진단된 바 있다.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인과 언론, 재계 등 기득권층이 겉으로는 중산층과 약자보호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의 배만 불려왔다는 인식은 이번 대선에서 좌우 포퓰리즘의 바람을 타고 멜랑숑과 르펜을 유력 주자로 부상시켰다.

갈수록 심해지는 정치적 냉소주의도 극복해야할 과제로 지적된다. 이번 대선의 결선투표 참가율은 74.7% 가량(입소스-소프테리아 추정치)로 지난 1969년 대선(68.85%) 이후 최저였다.

◇쇠락하는 경제…고립주의, 유럽연합 탈퇴 목소리 커져

전 세계가 프랑스 대선을 주목한 이유는 르펜이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과 유럽연합 탈퇴를 전면에 내거는 등 서구 정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르펜은 유로화 사용으로 인해 물가가 오르고 구매력이 저하돼 프랑스 경제의 경쟁력이 훼손되고 일자리 창출도 안 되고 있다면서 프랑화를 재도입해 통화주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변해왔다.

금융시장과 서구 정계 주류에서는 프랑스가 실제로 유로존과 유럽연합을 탈퇴하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후폭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전망을 앞다퉈 내놓았지만, 프랑스에서 이런 우려는 크게 먹혀들지 않았다.

이번 대선에 출마한 후보 11명 중 8명이 EU 탈퇴 파이거나, 당선되면 EU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겠다는 인물이었다.

르펜이 결선에 오른 것도 잇따른 테러 위협과 경기침체를 '프랑스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으로 헤쳐나가겠다는 포퓰리즘 공약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급진좌파 진영 멜랑숑도 반(反)세계화, 유럽연합 탈퇴를 주장하며 막판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대선 초반만 해도 군소후보에 머물렀던 그는 '데가지즘' 열풍을 타고 1차 투표에서 20% 가까이 득표하며 제1야당 공화당의 피용과 간발의 차로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반면에, 전통의 좌파 사회당은 고립주의와 포퓰리즘의 득세 속에 맥을 못 추고 몰락했다.

이변과 스캔들, 반전 등 극적 요인들이 어느 때보다 다분했던 이번 대선에서 사회당은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내 우파는 마크롱 쪽으로 집결했고, 좌파는 멜랑숑을 선호하며 분열상을 노출했다.

사회당의 몰락은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잇따른 테러와 경기침체와 높은 실업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좌·우 정책을 오락가락하면서 자초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사회당은 특히 소득과 교육 수준이 낮은 계층을 르펜의 국민전선으로 빼앗기면서 더이상 노동자 정당이라는 타이틀을 고수할 수 없게 됐다. 이는 비단 프랑스뿐만 아니라 서구 사회민주주의 계열 정당들이 직면한 과제이기도 하다.

◇집권 가능성 1위였던 피용, 부패 스캔들로 몰락…유권자 분노에 기름 부어

가장 극적인 사건은 피용의 세비횡령 스캔들이었다. 공화당 후보 피용이 아내 페넬로프와 두 자녀를 의원 보좌관으로 허위채용해 수년간 거액의 세비를 챙겨줬다는 의혹이 언론 보도로 잇따라 터져 나온 것이다.

'페넬로프 게이트'로 불린 이 스캔들로 인해 집권 가능성 '1순위'로 꼽혔던 피용은 지지율이 급락했다. 피용이 기업인 친구로부터 거액을 무이자로 빌렸고, 유력 변호사 친구로부터는 최고급 양복점에서 고가의 양복을 선물 받았다는 사실이 연이어 폭로됐다.

대선 국면에서 피용의 잇따른 스캔들은 프랑스인들의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을 극대화하는 기폭제로 작용하면서 '데가지즘' 열풍을 부채질했다.

특히 피용은 스캔들 대처 과정에서 사법부의 음모, 언론과 현 정부의 결탁설 등 근거도 없이 '음모론'을 제기하는 등 극우세력의 무책임한 선전 기법을 그대로 따라 하는 행태를 보여 더욱 비판을 받았다. 스캔들로 인한 피용의 몰락은 결국 르펜의 결선 진출을 도운 꼴이 됐다.

기득권층의 부패와 축재를 공격해온 르펜도 피용과 비슷한 세비 횡령 스캔들에 휘말리긴 매한가지였다.

유럽의회 의원 신분인 르펜은 측근 두 명을 유럽의회 보좌관으로 등록해놓고 실제로는 소속당인 국민전선의 일을 시키는 수법으로 유럽의회 공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번 대선을 통해 드러난 기득권세력, 특히 기존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분노는 총선 이후 새 정부와 새 의회에 대대적인 정치개혁을 압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치권이 기득권을 내놓지 않고 개혁에 저항할 경우 포퓰리즘과 데가지즘 열풍은 더욱 거세져 마크롱 정부의 정책추진 동력을 훼손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관측된다.

yonglae@yna.co.kr

(끝)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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