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이창환·장은영·김지윤·김위수 인턴기자=“제 첫 투표가 조금이나마 나은 나라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9일 서울 양천구의 한 초등학교 투표소에서 만난 20대 여성은 설레는 표정으로 이같이 말했다.
60일간의 대선 여정이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국정농단’ 사태 등 각종 비리로 얼룩진 지도자를 국민들의 손으로 끌어내려 얻어낸 투표라는 점에서 의미 깊은 선거다.
투표 당일, 서울 시내 곳곳의 투표소는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한 시민들로 북적였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온 젊은 부부, 머리가 희끗한 노인, 배낭을 메고 온 청년 등 다양한 연령층이 투표소를 찾았다. 미세먼지가 염려돼 마스크를 끼고 온 주민들도 눈에 띄었다.
투표소를 방문한 시민들은 저마다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 시내에서 시민들을 만나 차기 대통령과 정부에 바라는 점을 들었다.
◆ 개혁·협치·상생 통한 새로운 대한민국
이번 대선에서 유권자들의 관심은 무엇보다 ‘개혁’에 집중됐다. 이날 만난 많은 사람들은 차기 대통령에게 그간 쌓인 적폐를 청산해줄 것을 주문했다.
직장인 윤모씨(30대·여)는 “그동안 기득권 세력이 많은 것을 누려왔다. 최순실 사태는 겉으로 드러나 국민들에게 알려졌지만, 그와 비슷한 알려지지 않은 적폐가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적폐 청산을 강력히 요구했다.
대학생 이모씨 역시 “매일같이 터지는 비리에 질렸다”며 “특히 국정농단사태를 보며 다음 대통령은 청렴한 모습으로 정격유착의 고리를 끊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비리를 저지른 고위공직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유권자도 있었다. 직장인 김모씨(27·여)는 “박근혜, 최순실, 우병우의 일벌백계로 사법정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협력하는 대한민국을 원하는 유권자들의 목소리도 있었다. 투표소 인근 영화관 앞에서 만난 한모씨(43·여)는 차기 대통령에게 바라는 바를 묻자 “새로운 정부는 국회와 협력해서 전진하는 정부였으면 좋겠다”며 “협치를 통해 성숙한 정치문화를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장모씨(30) 역시 “총리, 장관을 포함한 고위공직자들을 자기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당에서도 고루 등용해 현실 협치를 이뤄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모씨(21·여)는 “이전 정권에서는 국민과의 소통이 너무 부족했다”며 정치권과 국민 간의 원활한 소통을 요구했다.
근처 카페에서 만난 이모씨(28)는 정치 참여의 허들을 낮춰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39세에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된 마크롱처럼 우리나라도 젊은 대통령이 나왔으면 좋겠다”며 “청년의 목소리가 정치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날 만난 일부 유권자들은 정치권을 향해 상생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줄 것을 거듭 당부했다. 40대 직장인 정모씨는 “깨끗한 나라로 다시 시작해 함께 가는 대한민국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부 신모씨(48)는 “사회 구석구석에 따뜻한 관심을 가져주는 정부가 됐으면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한편 부동산 중개업자 이모씨(61)는 “경제 살리고 나라안보 튼튼히 하고 청년 일자리 만들어주는 거 세 가지만 해도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 될 것”이라며 “공약 10개, 20개 지키려면 그건 박근혜 전 대통령이랑 똑같다. 허울뿐이다”라고 말했다.
◆ 경제 위기 해결 시급··· 방안은 제각각
유권자 대부분은 어떤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지 간에 지금의 대한민국은 ‘경제 살리기’가 필요한 시기라며 입을 모았다.
정육점을 운영하는 김모씨(50)는 ‘새로운 대통령에게 바라는 점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다른 요구도 많이 있겠지만, 가장 시급한 건 우리 경제의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라며 “장사하는 사람들은 다 똑같다. 경제가 어려우니 사람들이 돈을 안 쓰고, 그러다 보니 계속해서 경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익이 나서 장사를 계속 하는 게 아니라, 가게를 내놔도 나가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재래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한모씨(40·여) 역시 “사는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 여기서 장사한 지 오래됐는데 날이 갈수록 장사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며 “재래시장도 활성화시켜서 우리나라 전통시장 유지시킬 수 있는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 유권자는 치솟은 물가를 꼬집으며 ‘물가 안정’을 1순위 과제로 뽑았다. 일용직으로 근무하는 신모씨(50)는 “지금은 생활하면서 반드시 써야 하는 비용들이 많이 상승했다”며 “특히 재작년에 8600원이었던 의료비가 3배 이상 올라 지금은 2만8600원 수준”이라고 토로했다.
현장에서는 최저임금 인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있었다.
대학생 이모씨(27)는 “특히 임금구조의 개선이 시급하다”며 “대기업의 이윤이 불공정거래에 크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이를 확실히 제재하거나 하청 업체들과 이익을 공유하는 임금공유제를 강제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고 주장했다.
50대 경비원 이모씨 역시 최저임금조차 안 지켜질 때가 많다며 “휴식 시간을 늘리는 등으로 임금을 깎는 꼼수들을 막는 법안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한편 고용주와 근로자가 엇갈린 반응을 보이며 원하는 바를 밝히기도 했다.
자영업자 김모씨(58·여)는 새로운 대통령에게 ‘차별적 경제 정책’을 주문했다. 그는 “요즘 소상공인들은 장사도 안 되는데, 사람들은 대기업의 ‘노동자 부려먹기’만 생각해서 임금상승만을 외친다”며 “서민 고루고루 잘살게 하는 건 좋지만, (대통령이) 기업들의 형편도 생각해서 합리적인 경제 정책을 펼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반면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전모씨(26)는 고용주·근로자 간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시급은 적은데 일은 엄청 부려먹고, 퇴근시간이 됐는데도 눈치 보게 하는 환경이 개선되길 바란다”고 답했다.
일부 유권자들은 앞으로 들어설 차기 정부의 경제 정책을 비판적으로 내다봤다.
금융업계 종사자 차모씨(28)는 “무조건 ‘퍼주기 식’의 포퓰리즘 경제 정책을 지양하고, 기회의 평등을 잘 유지하도록 하는 경제정책을 해주길 바란다”며 “그리스 등 유럽국가의 재정위기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나라의 곳간 관리를 바르게 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회사원 이모씨(32)는 “정부는 매번 술, 담뱃값을 올릴 때마다 국민의 건강 증진 차원에서 세금을 올리는 것이라고 발표한다”며 “그러나 더 걷어들인 세금이 실제로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겠다. 다음 정부에서는 투명하게 세수 사용을 하길 바란다”고 지적했다.
◆ 주체·실리 외교로 ‘당당한 대한민국’
유권자들은 차기 대통령이 주권국 대표로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다.
투표소 앞에서 만난 양모씨(28)는 “다른 나라에 끌려다니지 말고, 주권 국가로서 당당하게 외교 무대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전했다.
직장인 허모씨(34)는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중국, 미국 둘 다 잡으려다 다 놓치지 말고, 선명하게 외교 노선을 정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모씨(25·여)는 “강력하고 일관된 외교정책을 펼쳤으면 좋겠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교 기조가 변하면 국민들이 혼란스럽고, 효과적이지도 않다”며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외교를 했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또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실리 외교를 주문했다.
김모씨(50·여)는 “지금 중국한테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며 “미국·중국·일본에 휘둘리지 말고 할 말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북한 문제도 (관계를) 잘해서 실익을 챙겨가며 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김재환씨(28)는 “미국·중국·일본·북한은 저마다 OOO 퍼스트 등 자국 중심으로 강경하게 외교정책 펼치고 있는데. 우리도 좀 우리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외교정책 펼쳤으면 좋겠다”며 “지난 보수정권 9년 동안은 우리가 손해를 보고 굴욕을 감내해야 했던 것 같다. 이제는 우리도 좀 뻔뻔하게 코리아 퍼스트를 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최모씨(30)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커지고 있는데, 주변국과 잘 협력해서 안보문제가 해결되길 바란다”며 “미·중 사이의 힘겨루기와 보호무역주의 기조 속에서 쉽지 않겠지만 안보·통상 모두 국익을 극대화하는 외교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북한 문제에는 단호하게 대처하길 바라는 모습이 많았다.
이모씨(77)는 “북핵을 제거해 국민들이 느끼는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모씨(64·여)도 “북한에 단호하게 맞대응 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다”며 “지난 정권의 대북 정책에도 잘못한 점은 있었다. 하지만 막무가내 식으로 나오는 북한을 단호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는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대학생 최모씨(23·여)는 “사드 문제를 실효성 있게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 사드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안인 만큼 당장 철회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미국, 중국, 북한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상황에 따라 최선의 외교 협상을 해야 한다”며 “또 박근혜 정부처럼 일방적으로 국민에게 통보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쳤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를 재협상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
직장인 정모씨(28·여)는 “위안부 피해자를 배제하고 양국 정부가 몇 시간 만에 한 것이 어떻게 합의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차기 대통령은 성의 있게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 세세한 생활밀착형 요구도 잇따라
유권자들은 담뱃값·등록금 인하, 공기 질 개선 등 일상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조윤기씨(30)는 “담뱃값을 인상했지만 막상 담배 소비는 줄어들지 않았다”며 “기존에 거둔 세수를 국민 건강 복지에 쓰고, 담뱃값은 다시 인하하는 게 맞는다”고 주장했다.
대학생 김모씨(23·여)는 “지난 정부에서도 반값 등록금을 내세웠는데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며 “불가능한 포퓰리즘 공약이 아니라 현실적인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 청년 수당 같은 일시적인 해결책보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60대 강모씨(여)는 “치매 노인에 대한 공약이 굉장히 맘에 든다”며 “국가가 개인의 노후와 건강을 적극적으로 신경써 줬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동물들의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대학생 김모씨(28)는 “동물 학대에 관한 처벌 수위가 낮아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개를 유기하거나 폭행하는 경우가 많다”며 “동물 학대를 강력 처벌하는 등 관련 법안을 강화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언급했다.
4살 아이와 투표소에 나온 허모씨(34·여)는 “아이를 키우다 보니 돈이 많이 든다. 민간 유치원도 재정적인 지원을 늘려서 맘 편히 아이 낳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최근 국민적 화두가 된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주부 유모씨(32)는 “미세먼지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미세먼지의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에 있다”며 “단순히 국민들에게 마스크를 쓰라고 하는 개인적 차원의 대책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국과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그 나물에 그 밥”··· ‘정치혐오’에 빠진 시민들
한편 이날 만난 유권자들 중 일부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는 60대 김모씨는 “정치인들은 신뢰할 수 없다”며 “무엇을 해달라고 말해봐야 다 똑같은 놈들에 그 사람이 그 사람, 그 나물에 그 밥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인근 시장에서 만난 윤모씨(20대) 역시 “누가 정치를 해도 내 삶에는 크게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냥 비리나 안 저질렀으면 좋겠다”며 냉소적인 시선을 드러냈다.
50대 김모씨(여)도 차기 대통령에게 원하는 바를 묻자 “정치가 제대로 돼야 세상이 나아지는데 정치인들이 다 자기욕심만 채우려고 정치를 하는 것 같아 슬프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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