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최송희 기자 =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배우 이정재(45)는 자신만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한때는 청춘의 아이콘이었고 또 한때는 로맨티스트의 대표 격이었던 그는 어느새 시대를 상징하고 대변하는 인물로 자리 잡게 됐다. 이는 비단 연기적인 부분만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점차 내부에서 외부로 옮겨졌다. 성찰을 넘어 주변을 살피고 공감하며 동화(同化)되는 과정. 배우 이정재의 관심은 곧 연기로 드러나게 됐다.
지난 31일 개봉한 영화 ‘대립군’(감독 정윤철) 역시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당시 ‘파천(播遷)'한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왕세자로 책봉되어 ‘분조(分朝)'를 이끌게 된 ‘광해’와 생계를 위해 남의 군역을 대신 치르던 ‘대립군(代立軍)'의 이야기를 그린 이번 작품에서 이정재는 대립군의 수장 토우 역을 맡았다.
조상 복 없고 배운 것도 없지만 카리스마와 의연한 대처 능력, 판단력으로 동료들의 신망을 얻는 인물. 더 나아가 광조와 분조 일행까지 이끌게 되는 이로서 이정재의 무게감이 돋보이는 캐릭터다.
“시나리오를 보고 놀랐어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고민, 풀어야 할 문제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잘 표현되어 있더라고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도 공감할 만한 요소가 많았죠. 이 문제를 내가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표현해 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이정재는 영화가 주는 메시지 내지는 주제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주제나 메시지에 현혹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칫하면 '관객을 가르치려 드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대화법’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가르치려 드는 걸 경계해야 해요. 대화하는 방법을 택해야 하죠. 질문을 던지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냐고 묻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연기적으로도 그게 훨씬 좋은 대화법이라고 생각하고요.”
극 중 토우는 군데군데 빈칸을 가진 인물이다. 식솔들을 멀리 두고 나와 남을 대신해 군역을 살고, 병법을 읽었으며, 계급 때문에 포졸도 채 하지 못했다는 힌트가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그것만으로 토우라는 인물이 완전해지는 건 아니었다. 토우의 공백은 오로지 이정재만이 채울 수 있었다.
“영화에는 반영되지 않았지만, 토우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대단한 인물이에요. 남의 군역까지 살게 된 배경이 있고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죠. 연기할 때도 ‘왜 토우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고민하고, 생각하며 연기했어요.”
이정재의 고민은 연기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밑바닥 삶을 대변하는 토우는 그의 전작이자 사극인 영화 ‘관상’ 속 수양대군과는 완전히 달랐다.
“신분이 차이가 있으니 연기에도 많은 변화가 생기더라고요. 몸동작부터 말투, 눈빛까지도 달라졌죠. 신분에서 주는 느낌이 있잖아요? 수양대군이 귀족 혈통의 감성이 있었다면 토우는 밑바닥 인생의 삶, 그 처절함이 온몸에 드러났죠. 살아온 방식이 다를 거로 생각했고 이 부분을 연기에 드러내고자 노력했어요.”
영화 ‘대립군’은 파격적으로 실내 세트 촬영을 배제한 올 로케이션 촬영을 감행했다. 영화는 조선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인 임진왜란 속, 실제 분조 행렬이 움직인 동선을 철저히 분석했고 국지전을 펼쳤던 사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리얼리티를 강화했다.
“(촬영이) 안 힘들었다면 거짓말이죠. 이 산을 올랐다가 저 산을 오르고··· 식사는 김밥이나 주먹밥 정도로 때웠죠. 음식을 나를 수 없는 상황이라서 배우, 스태프 모두 간단하게 끼니 정도만 채웠어요. 다들 많이 지쳐 있었는데 오히려 그 점이 (연기) 몰입에 많은 도움을 준 것 같아요. 하하하.”
처절하고 혹독한 시간이었다. 대립군과 분조 행렬이 적과 맞서는 상황을 로드무비 형태로 진행하기로 결정, 인공적 장소나 세트가 아닌 전국 방방곡곡을 누벼야 했다. 대립군이 겪는 험난한 전쟁 및 피란길을 생생하게 그려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이정재의 고생담이 낯설지 않다. “늘 고생하는 역할만 한다”고 농담하자, 이정재는 “이제 몸 좀 사려야겠다”며 눙쳤다.
“저도 이제 에어컨 바람도 쐬고 몸 좀 덜 쓰는 역할을 해야겠어요. 하하하. 아무래도 해보지 않은 역할, 영화에 대한 설렘이 있는 것 같아요. 끝나고 보면 고생한 작품이 만족도도 높더라고요. 이걸 해냈다는 성취욕이 들어서인 것 같아요.”
그런 이유일까? 최근 이정재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시대극이라는 점이었다. 영화 ‘관상’을 비롯해 ‘암살’, ‘인천상륙작전’ 등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하하하. ‘관상’, ‘암살’, ‘인천상륙작전’까지. 그때그때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을 선택했고 출연하게 된 거예요. ‘대립군’도 마찬가지죠. 일부러 시대극을 출연해야겠다 마음먹은 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재는 영화를 통해 시대를 꿰뚫어왔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극을 소화한 그에게 “연기해보고 싶은 시대 배경이 있나”고 물었다.
“80년대 배경? 하하하. 제가 마침 지금 영화 ‘남산’을 준비 중이거든요. 1980년도 초반 배경인데 마침 제가 접해보지 않은 시대라 궁금증과 기대가 커요.”
이정재는 정지우 감독의 영화 ‘남산’ 외에도 최동훈 감독의 ‘도청’을 준비 중이다. 작품, 그리고 캐릭터에 관한 이정재의 호기심과 욕심은 아직 무궁무진하다.
“문득 ‘생활 연기를 해본 게 언제더라?’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생활 연기에 관한 갈증이 있어요. 얼마 전 최동훈 감독에게 영화 ‘도청’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그 작품이 생활 연기를 해볼 수 있는 캐릭터인 것 같아요. ‘생활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하지?’ 걱정이 되기도 해요. 이번 기회로 저도 몸과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할 수 있는 때가 온 것 같아요. 관객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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