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보기의 그래그래] K선배님 전 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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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6-02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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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의 그래그래
(작가·북칼럼니스트)


K선배님 전 상서 - 인생사 수지청즉무어 인지찰즉무도(水至淸則無魚 人之察則無徒)이지 않나요?

K선배님, 기체후 일향만강하십니까? 이리 선배님께 펜을 든 것은 다름 아니라 엊그제 제 친구로부터 어떤 결혼식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선배님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글쎄, 제 친구가 고등학교 동창 A의 딸 결혼식에 갔는데 다른 동창들이 전혀 보이지 않더란 것입니다. 이유인즉슨 A가 평소 ‘난 맘에 없는 말은 못하는 성격’이라며 융통성이나 눈치 없이 직언직설만 하고 살아온 통에 주변에 친구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는군요.

언젠가 제 친구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A가 병문안을 왔더랍니다. 그런데 A는 남들이 다 그렇게 말하듯이 “친구, 힘내라. 요즘은 의술이 좋아 네가 포기하지만 않으면 이 따위 병은 아무것도 아니야” 같은 수사는 낯간지러워 못하는, 그러니까 원체 ‘반듯한 성격’인지라 “네 혈색 보니 쉽지 않겠다야. 미리미리 준비할 것들 있으면 준비하는 게 좋겠네” 하더랍니다. 이 양반의 매사 언행이 그렇다 보니 친구들마저 딸의 혼사를 보이콧했던 것입니다. ‘수지청즉무어 인지찰즉무도(水至淸則無魚 人之察則無徒)-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꼬장꼬장 따지면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처세술임이 분명한데, A는 그런 처세에 둔감한 정도가 아니라 마땅히 때와 장소에 맞는 언행을 모르는 ‘푼수’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 거죠.

그 이야기를 듣자니 오래전 제가 선배님을 찾아갔던 날이 문득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땐 제가 하던 일이 어려워져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을 때였죠. 크게 성공한 선배님이었기에 선배님을 찾아가면 ‘뭔가 희망의 끈을 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먼 길을 갔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러저러한 일을 해보겠다’는 저에게 선배님은 가차없이 직설적이었습니다. “그런 일을 왜 하냐? 나 같으면 자살하겠다”는 게 선배님의 ‘고언’이었습니다. 석양에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다른 승객들 몰래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 며칠을 코가 빠져 지내던 저는 Y선배님을 찾아갔습니다. 제 계획을 털어놓자 Y선배님은 “이봐! 당신이 그토록 하고 싶은 일이면 그냥 해. 당신의 미래를 이리저리 만들어가겠다고 미리 설계하지 마. 그냥 당신이 걷고 싶은 길을 열심히 걷다 보면 세상이 당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길과 만나게 돼 있어. 현애철수(懸崖撤手) 알아? 절벽에 매달려 더는 올라갈 힘이 없으면 죽든 살든 그 손을 놔버려야 다른 수가 생기는 거야”라며 저를 격려하더군요. 저는 Y선배님에게 ‘저보다 인생을 먼저 사셨는데 진짜 세상의 길을 만나더냐’고 몇 번을 되물었고, Y선배님은 ‘내가 책임질 테니 믿으라’고까지 했습니다. Y선배님이 실제로 뭘 책임질 수 없다는 것 정도야 저도 알았지만 그럼에도 Y선배님의 응원에 힘입어 ‘제 글’을 쓰는 일을 힘차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K선배님, 지금 저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저의 길을 만났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의 실명을 건 서평 ‘최보기의 책보기’가 이름을 얻고 있고, 그 사이 예정에 없던 책을 세 권이나 출판했습니다. 그중 한 권은 소설책입니다. 그리고 중앙 일간지에 당당하게 고정 지면을 쓰는 영광도 얻게 됐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세상이 만들어 놓은 제 길’에도 별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그런 길을 만나도 그만, 못 만나도 그만입니다. 아니면 지금 이미 제가 그 길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요.

K선배님, 2년 전입니다. 대기업에 잘 다니다 하루아침에 옷을 벗고 나와야 하는 처지에 몰린 친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에게는 회사 밖 세상에 대한 불안감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그새 제가 겪었던 산전수전을 대며 갖은 ‘구라’를 풀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이미 겪어왔잖니. 궁즉통(窮則通)이라고 신은 한쪽 문을 닫으면 반드시 한쪽 문을 열어주시더라. 얼어 죽기보다 굶어 죽기가 더 어렵다는 속담도 있지 않더냐. 눈높이와 타성을 깨면 너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책임질게. 현애철수 알아? 절벽에 매달려 더 올라갈 힘이 없으면 죽든 살든 그 손을 놔버려야 다른 수가 생기는 거야. 어차피 쫓겨날 게 확실하면 네가 먼저 그 회사를 박차고 나와버려”라며 입에서 거품이 나도록 큰소리 쳤습니다.

뭐, 저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서 그랬겠습니까? 퇴직 후가 두려워 찾아온 친구에게 ‘그래 그래, 세상은 아주 험한 곳이지. 너 이제 큰일났다. 나 같으면 자살하겠다”고 기를 죽이는 것은 경우가 아니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어두운 표정으로 왔다가 밝은 표정으로 떠났던 그는 지금 다른 직장에 대만족하며 잘 다니고 있습니다. 물론, 그 친구의 능력과 의지로만 그리됐습니다.

K선배님, 그러니까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어려운 처지에 빠진 누군가가 희망이 끈을 얻기 위해 선배님을 찾아오거든 좀 다른 접근을 부탁 드립니다. 선배님이 얼마나 성공했는지 마구마구 자랑만 하지 마시고, 모르고 찾아온 사람의 무지를 너무 꼬집지만 마시고, 어떻게 하면 그 사람에게 힘이 되는 ‘무책임한’ 말을 해줄지 염려하셨으면 합니다. ‘아닌 건 아니지. 나는 맘에 없는 말은 죽어도 못해’라 고집하기엔 세상 일이란 것들이 우리들 인간의 범주를 넘어 너무너무 복잡다단하지 않겠습니까? 이건 사족입니다만, 선배님의 옛 친구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선배님 뒷담화 깐다는 것은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선배님의 건승을 빕니다.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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