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동양 병학(兵學)의 대가(大家) 손자(孫子)도 정보의 중요성을 깨닫고 강조했다. 손자는 “적을 알고 나를 알았을 때도 매번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다만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그만큼 정보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는 의미다. 승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적에서 찾아야 된다.”고 했다. “정보를 통해 적을 알아야 된다.”는 점에서 백번 옳은 말이다. 유능한 지휘관은 정보를 통해 적의 강약(强弱)을 파악한 다음, 강점은 피하고 약점을 집중 공략함으로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래서 고금동서를 통해 전쟁을 잘하는 장수들이나 지휘관들은 적에 관한 첩보나 정보를 얻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여기서 첩보(諜報)는 적에 관한 모든 내용을 말하고, 정보(情報)는 첩보 중 확인되거나 입증된 사실만을 간추린 것을 이른다. 그런 점에서 첩보도 중요하지만, 전쟁승리에 더욱 가치 있는 것은 ‘정확한 정보’라 할 수 있다.
차일혁이 빨치산 토벌대장으로서 다대(多大)한 전과를 올렸던 것도 정보의 가치와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를 위해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차일혁은 정보 수집을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때로는 수색대를 통해 적에 대한 정보를 알았고, 때로는 주민들을 통해 적정을 수집했고, 때로는 포로 심문을 통해 알아냈고,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적에 대한 정보를 캐냈다. 차일혁이 빨치산과 싸우는 전국의 전투경찰대 중 수 없이 많은 승리를 통해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정보의 힘이 컸다. 차일혁은 정보 덕택에 뛰어난 전공(戰功)을 얻었던 반면, 자신의 대원들에 대한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정보는 아군의 손실을 줄이면서 적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주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가져왔다.
차일혁이 정보를 획득하는 과정은 치밀했고 때로는 눈물겹기까지 했다.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시절 차일혁은 ‘빨치산총수’ 이현상의 소재파악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넓디넓은 대한민국 후방지역과 지리산에서 이현상을 찾는다는 것은 마치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 이현상의 행방을 찾기 위해 노심초사할 무렵 차일혁은 빨치산 1명을 생포하게 됐다. 1953년 9월 4일쯤이었다. 차일혁의 지시로 전남 구례군 토지면 칠위각 부근에 잠복해 있던 수색대는 새벽 4시경에 섬진강을 건너려던 빨치산 2명을 발견하고 사격을 가했다. 1명은 잽싸게 도주하고, 다른 1명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도주하다가 피를 멈추게 하려고 임시방편으로 상처부위를 성냥불로 지지다가 차일혁의 수색대에 발각되어 생포됐다.
차일혁은 포로의 말투에서 보통 공비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년간의 토벌과 포로 심문을 통해 얻은 직관력(直觀力)이었다. 눈빛과 말투를 통해 볼 때 공산주의 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사상은 종교나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의 설득과 회유가 필요치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에게는 죽음이 가장 좋은 선물이고 안식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되자 차일혁은 자신의 권총을 꺼내 실탄 한 발만 넣고 그에게 주면서, “당신 소원이 죽는 것이라 해도,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소. 굳이 죽으려거든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오. 이 권총 안에는 한 발의 실탄만 남아 있소. 스스로 목숨을 끊든지, 아니면 나를 쏘든지,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그 순간 연대장실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참모들도 차일혁의 예기치 않은 행동에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만일 그 포로가 자결하지 않고, 연대장을 쏜다면 어떻게 될까?”하며 불안해했다.
포로는 떨리는 손으로 차일혁이 건네 준 권총을 잡았다. 그때 차일혁은 “만약 그 한 발로 자기를 쏜다면, 그것도 자신의 운명이려니…!”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차일혁은 그 포로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택하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주고 싶었다. “자신이 진실로 믿고 있는 공산주의 사상에 모든 것을 바친다면, 다른 어떤 죽음 못지않게 깨끗한 죽음이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포로는 자신도, 그렇다고 차일혁도 죽이지 못한 채, 그저 힘없이 권총을 내려놓으면서, “물 좀 주시요.”라고 말했다. 차일혁이 수통을 꺼내주자, 그는 허겁지겁 물을 들이키면서, “자결하지 못한 나를 비웃지 말고, 그냥 쏴 죽이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실신했다. 그 포로는 곧장 의무실로 옮겨 치료케 했다.
그때였다. 연대 의무실에 있던 경성제대(京城帝大) 약전(藥專) 출신의 정 경사가 차일혁에게 달려와, “연대장님 그 포로는 경성의전을 졸업한 이형련으로 제 고향 친구입니다. 연대장님 부디 그를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저도 치료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하고 말하지 않은가! 차일혁은 당장 정보주임에게 연락해 제5지구당 간부들의 신상명세서를 가져오게 했다. “이형련 29세. 제5지구당 기요과(機要課: 비서실) 부과장.” 이형련의 신상이 밝혀지자,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에서 김억순 작전과장과 참모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몰려왔다. 이형련은 경성의전출신으로, 광복 후 광주의 안과에서 근무했고, 6․25 발발 이후에는 전남도당에서 활동 중 입산했다. 그는 제5지구당 기요과 부과장과 부위원장 박영발의 전속 의무관으로 있을 때 제5지구당이 해체되자, 이현상을 떠나 전남도당으로 가던 중 생포됐다.
그런데 경찰병원 의사와 함께 이형련을 치료하던 ‘618부대(반공포로로 편성된 부대)’의 방래식이 차일혁에게 와서 “연대장님 아무래도 그자의 병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제대로 상처를 치료하지 못했고, 운이 없게도 파상풍까지 걸려 소생키 어렵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방래식은 반공포로로 풀려난 ‘북한 인민군’ 출신의 군의관으로 실력이 뛰어난 의사였다. 그는 서양의술뿐 아니라 한방(韓方)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나, “이형련의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차일혁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살려내야 돼!”라고 말했으나, 방래식은 고개를 저었다.
차일혁은 마지막 수단으로 구서칠 곡성경찰서장을 통해 전남 광주에 있는 이형련의 부인을 데려오게 했다. 차일혁은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 부인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또 혹시 이형련이 부인을 보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가졌다. 그때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이형련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형련 선생!” 차일혁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차일혁이 “당신은 제5지구당 기요과장(비서실장)이 아닙니까? 전쟁은 이미 끝났소. 아직 지리산만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소. 얼마 전 내 부하인 1대대장과 대원 다섯 명이 당신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소. 나 역시 계속해 당신들을 죽이고 있지만, 이젠 나도 지치고 지겹소.”라고 말하자, 이형련도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우리도 알고 있소. 그러나 우리는 산을 내려올 수 없소. 이승만과 그 주구들이 인민들을 괴롭히고 있는 한, 우리는 계속 투쟁할 것이오. 우리의 세력이 약해져 최후의 한사람이 남는다 해도 계속 투쟁할 것이요.”라고 말했다.
차일혁은 이현상의 행방을 알아낼 목적으로 “이 선생, 한 가지만 대답하시요. 이현상은 지금 어디에 숨어 있습니까? 북으로 올라갔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지리산에 있습니까? 절대로 이현상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테니 그의 거처를 말해 주시요.”라고 말하자, 이형련은 입을 다문 채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 사이 구서칠 경찰서장이 데려온 이형련의 처가 남편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만 3년 만의 만남이었으나, 남편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이다. 차일혁은 생명을 연장하는 길은 수혈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내 피는 O형이니, 내 피를 뽑으시요.”라고 말하자, 참모들이 나서며 “연대장님께서는 전투를 하는 지휘관이신데 피를 뽑아서야 되겠습니까?”라며 만류했다. 차일혁도 “우선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 하질 않소. 어서 서두르시요.”라고 단호히 말했다. 다급해 있던 경찰병원 의사가 “연대장님, 죄송합니다. 누가 공비에게 피를 줄 리는 없고, 급한 대로 연대장님의 피를 뽑겠습니다.”라며 나섰다.
수혈을 받고 겨우 정신을 차린 이형련에게 차일혁이 “당신은 의사니까 파상풍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거요.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결과는 모르겠소. 이현상의 거처와 있는 곳을 말하지 않아도 괜찮소. 당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주시요.”라는 말에, 이형련은 “당신들이 그토록 찾고 있는 이현상 동무는 이제 평당원으로 강등되었소.”라는 말만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형련의 얼굴은 파상풍으로 새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차일혁은 군의관을 불러 “이 자를 살려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내야 한다.”고 했으나, 의사는 “이미 늦었습니다. 파상풍균이 온 몸에 퍼져 몇 시간을 넘기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차일혁은 중국에 있을 때 봤던 민간요법이 생각나 급히 돼지껍질을 구해오게 한 후, 돼지 껍질을 이형련의 몸에 덮어 씌웠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형련의 얼굴은 더욱 더 새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차일혁도 더 이상 치료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우리가 구천에서 만날 때는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없는 곳에서 만납시다. 이제 말을 안 해도 좋으니, 그저 고개만 끄덕여 주시요.”라고 말하면서, 지도를 펴서 이현상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가리키던 중 반야봉 남쪽 빗점골에 이르자, 이형련은 고개를 한번 끄덕거린 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하지만 이형련은 차일혁에게 ‘고마움과 보은(報恩)의 답례’로 이현상의 소재지를 알려줬다.
이형련은 죽어가면서 “적으로 여기지 않고 죽어가는 한 인간으로 보고 온정(溫情)을 베푼 차일혁의 뜨거운 인간미와 지휘관으로서의 열정”에 그만 감동되어, ‘교주(敎主)나 다름없는 정신적 지주’인 이현상의 거처를 알려주고 떠났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했던가! 총부리를 겨눈 적이기에 앞서 차일혁의 너무나 인간적인 배려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정보를 얻으려는 무인(武人)으로서의 책임의식과 애국심 그리고 헌신적의 노력에 당성(黨性)이 누구보다 강했던 이형련도 더 이상 버텨내지 못했다. 차일혁은 그렇게 해서 결국 이현상을 사살할 수 있었다. 이는 정보를 중요시한 차일혁의 노력이 빚어낸 결과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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