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애국심이야말로 황다녠(黃大年)의 정신근간이었으며 행복의 원천이었다. 황다녠 동지를 모범으로 삼아야 하며, 그의 가슴속의 위대한 자아를 배워야 한다. 그는 과학보국의 이상을 가지고 조국의 부강과 민족진흥, 인민행복을 위해 일생동안 공헌을 아끼지 않았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25일 황다녠이라는 인물에 대해 내린 평가다.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가 황다녠의 인생을 집중조명하기 시작했다. 현재 학계와 과학계는 물론 국영기업, 민영기업 직원들이 황다녠을 학습하고 있다고 공상시보가 12일 전했다.
1958년생인 황다녠은 광시(廣西)장족자치구 난닝(南寧)시 출신이다. 문화대혁명이 종료되던 1978년 지린(吉林)성 장춘(長春)지질학원(현재 지린대학 지질학원)에 입학했으며, 1981년 졸업했다. 1982년 학교에 남기는 졸업생 증서에 "중화진흥은 내 인생의 책임'이라는 말을 남겼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캠브리지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했으며, 그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전공은 지구물리학으로 심해탐측이 주요 연구분야였다. 2004년 병세가 위급했던 그의 아버지는 황다녠에 전화를 걸어 "너는 조국이 있는 사람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 한마디가 아버지의 유언이 됐다.
그는 2009년 영국에서의 모든 삶을 포기하고 중국에 귀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높은 연봉과 명성을 포기하고 중국에서의 삶을 택하기란 쉽지 않다. 당시는 중국 당국이 '천인계획(유학중인 중국인 인재를 본국으로 불러들이는 계획)'을 추진할 때였다. 두곳의 병원을 운영하던 부인이 반발하자, 그는 이혼할 것을 요구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부인은 귀국해야할 때가 운명적으로 다가왔음을 알고 병원을 매각하고 귀국준비를 도왔다.
그가 귀국할때 한 외신에서는 "황다녠의 귀국으로 중국 인근에서 훈련을 하는 서방의 항공모함 전단이 중국으로부터 100해리 더 물러서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귀국과 함께 그는 지린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심해탐측장비 연구개발과 실험프로젝트가 그가 맡은 일이었다. 중국은 이를 국책사업으로 삼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방세계는 심해탐측장비를 중국에 팔지 않았으며, 중국에는 장비를 만들 기술이 없었다. 황다녠은 장비국산화를 위해 매진했다. 순식간에 400여명의 과학자들이 모였으며 황다녠과 함께 연구를 진행했다. 그의 사무실은 새벽 2~3시에도 불이 꺼질 줄 몰랐으며 그는 연구에 매진했다. 사무실에 불이 꺼져 있다면 그가 출장을 갔다는 뜻이었다. 출장에서 돌아오면 그는 집에 들르지 않고 곧장 연구실로 향했다.
2016년6월28일 그는 탐측장비를 개발하는데 성공했고, 장비는 글로벌 최정상 수준의 성능을 지녔다. 그가 개발해낸 탐측장비는 중국 무인기에 적용됐으며, 중국의 레이더망에 사용되고 있다.
2016년 가을부터 쓰러졌다가 깨어나길 반복했다. 그해 12월에는 부인의 권유에 못이겨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해있으면서도 동료 과학자들을 불러모아 업무지시를 내렸었다. 그러던 황다녠은 지난 1월8일 사망했다. 향년 5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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