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김창익 기자 = '모르쇠’는 유용한 정치공학이다. 2008년 조경태 당시 민주당 의원은 국정감사 때마다 SK에너지·GS칼텍스 등 정유 4사를 “서민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고 몰아세웠다. 정유 4사를 주적으로 내세워 ℓ당 1500원에 달하는 유가에 한숨 짓는 중산층·서민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휘발유 가격의 60%가 세금이란 사실은 의도적으로 은폐됐다. 당시 그의 수석보좌관은 기자에게 "정유사가 흡혈귀가 아니란 사실은 정유사가 증명할 문제"라고 했다.
10년 뒤 이 같은 '전략적 무지'가 재현됐다. 강산이 바뀐다는 시간 동안 우리 정치공학에선 진화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23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가진 취임식에서 최근 주택가격 급등을 다주택자의 투기결과로 규정했다. 특히 5주택 이상 다주택자를 주적으로 내세웠다.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 같은 통계가 김 장관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큼 유의미한 것이냐는 별개 문제다.
전략적으로 무시됐을 개연성이 있는 추가 통계를 보자. 5월 강남4구 주택거래량은 총 3997건이다. 이 중 5가구 이상 다주택자의 거래는 98건, 29세 이하 연령대의 거래는 134건이다. 각각 2.5%와 3.3%에 불과하다. 90% 이상이 무주택자와 이주를 위한 실거래로 추산된다.
김 장관이 다주택자의 투기로 규정한 이 3% 안팎이 주택가격 상승을 유발하는 촉매제가 될 수는 있다. 이들을 주택시장의 주적으로 내세워 투기과열지구 지정, 양도소득세·보유세 인상 등 강도 높은 규제 대책이 나올 수도 있다. 선두마 한 마리의 방향을 틀면 말떼를 쉽게 우리로 몰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주택자가 강남 아파트를 매입한 것 자체만 가지고 이들을 전쟁의 대상으로 거론하는 건 잘못된 정치공학이다. 29세 이하 연령대의 거래는 자금출처를 밝혀 이 과정에서의 편법 증여·상속을 차단할 성격의 문제다.
되돌아보면 이 같은 상황은 경기부양을 위한 전 정부의 정책목표였다. 다주택자 등 부자들의 강남 재건축 고가 아파트 거래를 늘려 주택가격이 상승하면 중산층·서민들의 구매력이 높아져 경제 전체를 되살릴 수 있다는 게 '초이노믹스'의 골자였다. 이른바 낙수효과다.
정권이 바뀌어 정책목표는 성장에서 분배로 무게중심이 옮겨졌다. 이론은 낙수효과에서 분수효과로 바뀌었다. 고가주택 소유자 등 부자들의 세금을 늘려 중산층·서민의 주거복지를 높여야 경제가 살고 결과적으로 부자들도 이익이란 논리다.
경기회복을 위한 정책수단으로 동원됐던 다주택자가 이 과정에서 타도될 투기꾼으로 전락했다. 전 정권의 책임이라고 고개를 돌린다면, 대한민국은 정파만 있고 정부는 없는 셈이 된다. 시세차익이 뻔히 보이는 주택시장에 저금리로 갈 길을 잃은 부동자금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 같은 구조의 설계자는 시장이 아니라 정부다. 말떼 몰이를 한 정부가 정권이 바뀌었다고 선두마를 죽이는 건 책임전가다.
김현미 장관은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엔 줄곧 정치판에서 살았다. 최근 수년간은 기획·재정과 예산·결산 관련 업부를 맡았다. 그가 정치공학의 필터로 조세·금융의 측면에서 주택시장을 보기 쉬운 이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가 국토부 장관 내정 직후 LTV(주택담보인정비율)·DTI(총부채상환비율) 등 금융규제를 먼저 언급하고 취임 일성으로 사실상 양도세와 보유세 인상을 예고한 것은 태생적 한계다.
김 장관은 곧 SOC·주택 정책을 펼치는 데 국토부가 얼마나 힘이 없는 조직인지 깨닫게 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예산을 따는 데 기획재정부와 국회의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 절감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과거 정치 이력은 이제 국토부 장관직을 원활히 수행하는 조력수단이 돼야 한다. 그가 아직까지 국회 배지를 품고 기획·재정의 안경을 낀 채 국토부 장관 직무실에 앉아 있다면 큰일이다. 빨리 국토부 장관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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