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3대 금기(禁忌) 사항이었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과, 작전 중 절대 노루를 잡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절대로 사찰을 소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차일혁은 빨치산토벌대장으로 있으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것 3가지만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차일혁이 개고기를 먹지 않는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전쟁 초기 유격전을 할 때 차일혁은 식량을 구하러 원기리에 있는 사돈집에 가서 개고기를 먹은 바로 그날, 총에 맞는 불상사를 겪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하들이 개고기를 먹는 것까지는 말리지는 않았지만, 차일혁 자신은 결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차일혁은 어릴 적부터 사찰(寺刹)에 대해 유별난 외경심(畏敬心)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작전 중이라도 사찰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차일혁은 작전 중 비록 빨치산들이 암자에 숨어 있더라도 공격하지 않도록 했다. 사찰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질이 불같은 차일혁이 싫어하는 3가지가 또 있다. 그것은 회식할 때 일본노래 부르는 것과, 적의 목을 베라는 지시, 그리고 3대 금기사항에 들어간 바 있는 절을 불태우라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이 3가지를 무엇보다 싫어했다. 그리고 이 3가지는 자신에게 어떠한 불이익이 오더라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차일혁은 회식 때 일본 노래를 부르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했다. 차일혁은 아무리 상급자라도 회식 자리에서 일본노래 부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회식 상을 걷어차서라도 이를 중지시켰다. 차일혁은 회식자리에서 일본노래를 부르는 대신 장구를 치며 우리 가락에 맞춰 우리의 소리를 노래하거나, 음률에 맞춰 시조를 읊조리는 것을 즐겨했다. 이른바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문화시민이자 경찰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차일혁이 절을 훼손하거나 불태우지 않는 것은 유명하다. 차일혁은 작전에 지장을 준다고 사찰을 불태우라는 상급기관의 명령을 결코 따르지 않았다. 자신에게 불이익이 오더라도 이를 감수했다. 차일혁의 그런 노력으로 빨치산의 은신처로 사용되는 전북내륙 지역과 지리산 자락의 천년고찰들이 전쟁의 화마(火魔)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차일혁은 “절을 불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전해지는 천년고찰들이 바로 화엄사, 내장사, 천은사, 선운사 등이다. 차일혁이 아니었으면 하마터면 잿더미로 변했을 고찰들이었다.
차일혁이 토벌작전을 하면서 가장 싫어했던 것이 빨치산의 목을 베어오라는 상급부대의 지시였다. 전북도경사령부와 치안국에서 파견된 독전관(督戰官)들은 빨치산의 목을 잘라오지 않는 한 전과(戰果)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전북도경에서도 공식으로 공문(公文)을 보내 죽은 빨치산의 목을 잘아와야만 전과를 인정하겠다고 했다. 전과 확인을 위해 이전에도 요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죽은 공비의 귀를 자르라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차일혁은 그런 상급부대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해서 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요했다. 차일혁은 도경 간부들과 치안국에서 파견된 독전관들에게 그 부당성을 따졌다. “적을 죽이면 됐지, 목까지 잘라서 뭐하자는 거냐?”고 따졌지만 소용없었다. “이건 우리의 뜻이 아니라 미 고문관의 명령”이라며 고압적으로 나왔다. 차일혁도 지지 않고 “미 고문관이 그런 명령을 내렸을 리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것은 사실이오. 경찰이나 군인들이 공비토벌을 하면서 허위보고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조치가 취해진 것이요”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차일혁이 그에 대해 “그럼 잘못됐다는 얘기를 다시 할 수 없느냐?”고 따져 물었다. 독전관들도 그런 차일혁의 말에 화가 났던지 “여지껏 차 대장의 좋은 점을 많이 봐왔지만, 꼭 상부지시에 토를 다는 버릇이 있군요”라며 못마땅해 했다. 차일혁도 지지 않고 “그럼 전과가 없는 걸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그건 차 대장의 일방적 생각이지, 모든 부하들의 의견은 아니지 않은가?”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차일혁도 더 이상 말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사살한 적들 중에서 박달대장 박양식 등 간부 3명의 목을 잘라오라”고 명령했다. 도경간부들에게 목을 잘라 경각심을 주지 않는 한 전과를 위해 빨치산의 목을 자르라는 지시가 멈출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일혁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살한 빨치산의 목을 자르라는 지시를 내렸다. 생각다 못해 짜낸 궁여지책(窮餘之策)이었다.
차일혁의 그런 지시에 18전투경찰대대의 종군기자로 따라 다니며 취재했던 전북일보 김만석 기자가 길길이 날뛰었다. 김만석 기자는 “아니 나는 여지껏 차일혁 대장이 적의 시체를 잘 묻어준 온정(溫情)의 무인(武人)이라고 신문에 보도를 하곤 했는데, 거 무슨 야만인의 짓입니까?”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차일혁은 그런 김만석 기자의 마음을 헤아렸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을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부하들이 빨치산 간부 3명의 잘린 목을 소쿠리에 담아 차일혁에게 왔다. 차일혁은 즉시 잘린 빨치산 목을 도경간부들에게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목을 잘라 오라고 지시했던 전북도경 간부들에게 빨치산 3명의 목을 보냈다. 다음날 그것을 본 도경 간부들은 기겁을 했다. 도경 수뇌부에서는 차일혁의 행동에 한 동안 시끄러웠다. 차일혁이 노린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사건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자는 것이 차일혁의 의도였다. 차일혁의 의도는 적중했다. 도경 수뇌부에서 내린 지시에 일선 지휘관인 차일혁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자 도경수뇌부도 더 이상 빨치산 목을 잘라오라는 지시를 강행할 수 없었다.
차일혁은 도경간부에게 빨치산 목을 보낸 후 전과를 위해 목을 자르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미 고문관을 만나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미 고문관은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했다. 미 고문관은 “우리는 당신들이 좀 더 정확한 전과보고를 하라고 했을 뿐이지, 공비들의 목을 자르라는 지시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차일혁은 미 고문관의 대답을 통해 전후 사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빨치산 토벌작전 중 일선 부대에서는 공비토벌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고, 상부에서는 이에 대한 문책이 계속되자 허위로 전과를 보고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됐다. 그래서 상부의 지시와 미 고문관의 독촉에 못 이긴 도경간부들이 일선 지휘관들에게 서면으로만 전과를 보고하지 말고, 사살된 공비들의 목을 확인용으로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빨치산 목을 자르라는 지시는 책상머리에 앉아 있던 도경간부들의 ‘얄팍한 머리’에서 나온 면피용 조치였던 것이다.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그것을 결국 차일혁이 막았다.
그렇게 해서 차일혁은 자신이 부당하다고 여겼던 빨치산 목을 전과로 바치라는 상부의 지시를 듣지 않아도 됐다. 차일혁의 과단성(果斷性) 있는 행동으로, 한 때 나쁜 관행(慣行)으로 정착될 뻔했던 ‘사살한 빨치산 목’을 자르라는 지시는 사라지게 됐다. 인간적으로나 도의상 해서는 안 될 일인 줄 알면서 선뜻 나서지 못했던 일을 차일혁이 나서 결국 해결했던 셈이다.
차일혁은 아무리 살육(殺戮)이 난무하는 잔혹한 전쟁이라고 해도,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와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인간미가 넘치고 정감(情感)이 풍부한 빨치산 토벌대장이었다. 차일혁은 비록 현실에서는 전쟁을 하고 있지만, 전쟁이 끝난 후를 생각하며 행동하는 이성(理性)을 갖춘 건전한 지휘관이기도 했다. 차일혁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전투를 늘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혈흔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지만, 그들도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한시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싸울 때는 지휘관으로서 또 전투원으로서 생사를 걸고 최선을 다해 싸우지만, 일단 전투가 끝나면 인간의 도리를 생각하며 그 수준에서 행동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빨치산 토벌대장이었다. 그것이 바로 차일혁만이 자연스럽게 낼 수 있는 인간적인 멋이요, 사나이로서 최소한 지키고자 했던 기개(氣槪)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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